미국이 화웨이에 이어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업체인 SMIC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에 나섰다. 사실상 중국 반도체 산업 궤멸을 위한 조치다.

중국 기업에 대한 미 정부의 규제가 잇따르자 우리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미국이 중국 기업 차단에 따른 수혜를 자국 기업에 몰아줄 가능성이 크고, 중간에 낀 우리 기업은 별다른 수확을 거두지 못할 것이란 관측에서다.

중국 상하이 소재 SMIC 회사 전경 / SMIC 홈페이지
중국 상하이 소재 SMIC 회사 전경 / SMIC 홈페이지
27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25일 자국 반도체 업체들에 ‘SMIC에 반도체 기술·장비를 수출하려면 라이선스(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 WSJ는 "미국 정부가 SMIC의 반도체 기술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이용될 수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SMIC는 2000년 설립된 중국 1위 파운드리업체로 상하이에 본사를 뒀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SMIC는 파운드리 점유율 4.5%로 세계 5위다. 반도체 자립(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 달성)을 목표로 내건 중국 정부로부터 전폭적 지원을 받는다.

앞서 중국 정부는 미국 제재로 화웨이 등 중국 통신 업체가 반도체를 수입할 길이 막히자 SMIC 등 자국 반도체 기업을 키우기 위해 막대한 투자에 나섰다. 5월 17일에만 SMIC에 22억달러(2조7000억원)를 투입했고, 15년간 법인세 면제를 지원했다.

하지만 SMIC가 블랙리스트 당사자가 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소재, 제조 장비, 소프트웨어 등을 미국 등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SMIC의 공급선이 막힌다. SMIC의 매출 중 18.7%를 차지하는 화웨이가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됐다. 미 정부 제재가 중국 반도체 굴기를 정면 겨냥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중국 반도체 산업 타격으로 한국 파운드리 기업의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SMIC가 삼성전자와 TSMC만 가능한 7㎚ 공정 진입을 노리던 잠재적 경쟁자였던 만큼 삼성전자의 수혜가 클 것이란 예상이 있다. SMIC 등에 주문을 넣은 퀄컴이 삼성전자에 긴급 주문을 넣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90나노 이하로 8인치(200㎜) 공정을 주력으로 하는 DB하이텍, SK하이닉스가 100%를 보유한 파운드리 전문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IC도 중국 시장 공략이 수월해지는 등 반사이익을 누릴 것으로 전망된다. SMIC의 2분기 매출에서 내수 비중은 66.1%(6억2032만달러)에 달한다. 특히 90나노 이상 라인 비중은 42.7%를 차지한다.

삼성전자(위)와 SK하이닉스 로고/ IT조선 DB
삼성전자(위)와 SK하이닉스 로고/ IT조선 DB
하지만 미국의 이같은 중국 반도체 때리기는 어디까지나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닌 미국을 위한 전략이다. 자국기업 보다 한국 기업이 수혜를 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공산이 크다.

실제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자국 이익을 위한 후속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미 종합 반도체 업체인 인텔과 AMD는 최근 미 정부로부터 중국 화웨이에 일부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인텔과 AMD는 미국 허가를 받은 거래 품목이 밝히지 않았지만, 허가받은 품목은 서버용 CPU와 칩셋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 한국 기업도 미 상무부에 화웨이 수출 관련 특별허가를 요청한 상태지만 승인 기대감은 낮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기업이 화웨이에 주로 공급하는 것은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폰용 중소형 OLED로, 화웨이의 핵심 사업인 스마트폰 생산과 직결된다"며 "수출 허가 승인이 선착순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만큼 미 정부가 타국 기업에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SMIC 제재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는 동시에, 자국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전략을 펼친다.

27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미 의회는 자국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생산 및 연구개발(R&D)을 촉진시키기 위해 250억달러(29조4000억원) 규모의 보조금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 이 보조금은 2021년 예산안에 포함될 예정이다.

닛케이는 미 의회와 행정부가 자국 반도체 기업에 거액의 보조금을 줘 공급망(서플라이 체인)의 중심을 미국으로 되돌려놓으려 한다고 전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중 갈등으로 중간에 낀 한국 기업은 대중 수출길은 점차 사라지고, 단기적 수혜 역시 미 정부의 반도체 자립 정책이 강화하면서 희석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