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나, 민자영]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0.16 23:00

    [그림자 황후]

    1부 나, 민자영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1858년 봄.
    한 줄기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무거운 밤을 내몰려는 듯 새벽빛은 집요하게 온몸을 파열시키듯 확장해가고 있었다.
    닭 우는 소리에 깬 계집아이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자기 전 얼굴에 발라둔 면약(面藥)을 한 번 척척 만져본 뒤 좁쌀 죽 위에 뜬 물로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돼지다리를 푹 고아 아교처럼 만든 면약을 바르고 자면 얼굴이 고와졌다. 자신의 나이보다 10년 넘게 젊어 보이는 어머니 한산 이씨의 비법이었다.
    계집아이는 민자영, 민치록의 외동딸이었다.
    갈가마귀 같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두 눈은 유난히 맑고 반짝였다. 곧고 가늘게 뻗은 코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입술은 상큼해 보였다. 도톰한 입술은 투명한 데다 고운 홍색이라 오미자열매를 문 듯했다. 목이 길고 가늘어서 얼굴은 더 작아 보이고 어깨는 가냘펐다. 면약을 발라서일까 백합같이 흰 얼굴에 광채가 나는 듯했다.
    자영은 매무새를 갖춘 뒤 치마를 팔랑이며 사랑채로 달려갔다.
    민치록은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몸이 안 좋은 민치록의 안색은 누르스름하니 기름기가 없었다.
    "일찍부터 무슨 일이냐?"
    민치록에겐 귀여운 딸이지만 몸이 불편한 뒤로는 매사가 심드렁해졌다. 군수 자리와 *장악원(음악 관련 일을 맡던 관청) 첨정 등을 맡았지만 몸이 편찮은 뒤로는 의욕이 나지 않았다.
    자영은 재빨리 아버지의 표정을 살핀 뒤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민치록의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울렸다. 자영은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님 다른 집에서 서책을 빌리고 싶사옵니다."
    "뭐라? 집에 있는 <사기>를 읽어라."
    "아이참 아버님도. 그건 이미 읽었어요."
    자영은 치마를 팔랑이며 아버지 앞에 앉았다.
    "무슨 책을 보고 싶다는 게야?"
    "<*자치통감 강목(송나라 주희가 쓴 중국 역사서. 송의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이 294권으로 워낙 방대해, 그 축약본(59권)이랄 수 있는 강목이 널리 사용됐다)>을 보고 싶사옵니다."
    "뭐?"
    민치록은 사레가 들려 켁켁 거렸다.
    "네가 어떻게 <강목>을 읽는다고! 책도 한두 권이어야지."
    민치록은 손을 내저었다. 자영이 자세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아버님이 책을 읽으면 세상을 가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책을 많이 읽으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책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민치록은 자영이만큼 총민한 아이를 보지 못했다. 1남 3녀 중 다른 자식은 다 죽고 하나 남은 자식이라 어려서부터 글을 가르쳤더니 이 정도까지 된 줄은 몰랐다.
    "이 여주에는 <강목>을 가진 집이 없어!"
    기침을 한바탕해댔더니 목이 쉬었다.
    "그럼 어디서 구할 수 있어요?"
    "한양에서도 큰 대가 집에나 있지."
    자영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자영에게 사서(史書)만큼 재미나는 책도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꼭 봐야만 살 것 같았다.
    민치록은 2년 전 일이 떠올랐다.
    ‘저는 언제 과거를 보나요? 부지런히 글을 읽어 장원급제하고 싶어요.’
    민치록이 계집아이는 과거를 볼 수 없다고 했을 때 자영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땅이 꺼질듯한 허탈함, 소름이 끼칠만큼 반항적 표정이 한꺼번에 아우성을 쳤다. 순간 민치록은 자영이 까무라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영은 어쩐 일인지 이후 더 지독하게 책을 읽어댔다.
    "저 한양에 다녀올게요."
    "허허 계집아이가 어디라고 한양을 간단 말이냐!"
    계집아이를 혼자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형편에 종을 붙이고 *교군(轎軍, 가마꾼)을 빌려서 태워 보낼 수도 없었다.
    민치록은 가뜩이나 기운이 없는데 노여움과 짜증이 몰려왔다.
    이때 여종 초계가 살그머니 들어와 민치록의 이불을 조심스레 개기 시작했다.
    순간 잔뜩 찌푸렸던 민치록의 미간이 스르르 풀어졌다.
    "나으리- 어제는 잘 배우고 왔습니다."
    자영은 평소 듣던 초계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느꼈다. 민치록은 자영보다 한 살 위인 초계를 동네 기생에게 보내 가야금을 배우게 했다. 민치록은 아내에게 귀한 손님이 왔을 때 기생을 부를 여유는 없으니 초계에게 가야금을 가르쳐 손님 앞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초계는 신이 나 기방을 들락거리며 가야금을 배웠다. 민치록은 비가 내리거나 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초계를 불러 가야금을 뜯게 했다. 이 씨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방을 훔치던 초계가 한쪽 구석에 세워진 가야금을 두 팔로 꼬옥 안아 옮겼다. 그 밑자리도 닦겠다는 것인데 마치 사내를 안는 듯했다. 이를 보던 민치록의 누리끼리한 얼굴과 목덜미가 불그레해졌다. 자영은 아버지의 묘한 표정을 보았다.

    자영은 끼니를 굶기 시작했다. 꼭 이루고자 할 때 자영이 부모에게 보여주던 일이었다. 어머니 이씨가 회초리를 들어도 자영은 굽히지 않았다. 화가 난 이 씨가 어둡고 찬 뒷방으로 자영을 집어넣었다.
    "아기씨 한양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건너오시랍니다."
    사랑채에는 통통한 뺨에 혈색이 좋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아 네가 자영이로구나."
    사내는 씨익 웃으며 자영을 반겼다.
    "듣던 대로 아주 총명하게 생겼습니다 하핫."
    "오라버니다."
    민치록의 아내 이 씨는 쓸쓸한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자영보다 스물 한살이나 많은 승호, 양자 입적을 생각하던 민치록이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조카였다.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여야 하는 민치록과 이 씨의 마음은 스산했다. 민치록의 전처 오 씨는 자손을 남기지 않고 숨을 거뒀고, 후처인 이씨는 1남 3녀를 낳았지만 자영만 살아남았다.
    민치록은 샐쭉해져 있는 자영을 쳐다보았다. 떼를 쓸 때는 패주고 싶도록 밉더니 문득 측은해 가슴뼈가 뻐근했다.
    ‘저것이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영은 승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양에 가실 때 저도 따라갈래요."
    "뭐 뭐? 한양엔 뭣하러 가려고?"
    승호는 당황해 콧등에 땀이 배였고 민치록과 이 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양에 가서 <강목> 몇 권 빌려보고 싶어요."
    "거 참!"
    민치록이 다시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이 씨는 혀를 찼다.
    "<통감 강목>말이냐? <강목>은 우리 집에도 없는데? 하핫 여중 선비가 났구나. 좋다! 같이 가자! 한양에서 <강목> 하나 빌릴 수가 없겠느냐. 내가 꼭 찾아주마. 제가 자영이를 잘 데려갔다 보내겠습니다."
    자영은 시원시원한 승호의 말이 듣기 좋았다.

    다음날 새벽 자영은 승호와 조랑말을 빌려 타고 길을 나섰다. 자영은 작은 갓을 쓰고 얇고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가렸다. 종이 하나 따라붙었다.
    처음 장거리 여행에 나선 자영은 가슴이 두근거려 앞섶이 터질 것 같았다. 의연한 척하면서도 조랑말의 갈기를 단단히 붙들었다. 조랑말의 배를 꽉 조인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집채만큼 짊어진 소가 지나가고 말린 미역 등을 맨 보부상이 잽싸게 지나갔다. 명승지를 찾아 유람을 떠나는 사내들과 묫자리를 보러 가는 무리들도 적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온통 봄 산이었다. 연두빛 아지랑이가 먼 산을 너울처럼 휘감고 있었다. 풋풋한 진달래가 진중한 산을 흔들고 있었고 산벚꽃은 막 옷을 벗으려는 듯 상큼하면서도 고혹적이었다.
    자영은 낯선 볼거리와 예상치 못했던 풍광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규방 밖의 새로운 세상이었다.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자영을 어디론가 끌어올리는 듯했다.
    "한양이다!"
    승호가 자영을 보며 소리쳤다.

    (10월 23일 23:00에)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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