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 나, 민자영] (2)왕후족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0.23 23:00

    [그림자 황후]

    1부 : 나, 민자영

    (2)왕후족

    자영이 숭례문을 지나자 자수정 같은 밤이 내려오고 있었다. 산에 피어 올린 봉화가 영롱한 홍옥처럼 반짝였다. 통행을 금하는 인경 소리가 들리자 낯선 곳에 왔다는 비릿한 생경함이 몰려왔다. 곧이어 새로운 뭔가가 다가오고 있을 것 같은 설레임,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몰려 왔다.
    "이곳이 인현왕후께서 머무셨던 곳이다."
    자영은 승호를 따라 안국동 집으로 들어갔다.
    자영은 먼지가 풀풀 나고 울퉁불퉁한 길에서 지쳤지만 승호의 말에 눈을 반짝 떴다. 희빈 장씨에게 빠졌던 숙종이 왕비였던 인현왕후 민씨를 대궐 밖으로 내쫓았을 때 머물던 친정집이었다. 자영은 아버지로부터 인현왕후의 후손임을 누누이 들었다.
    인현왕후는 안국동 친정으로 오자 가족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혼자 지냈다.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아래채에서 생활했다. 뚫어진 문에 창호지도 바르지 않고 죄인처럼 지냈다. 안마당의 잡초도 뽑지 않고 우물과 측간 다니는 길만 남겨놓아 폐옥처럼 변해버렸다. 결국 희빈 장씨는 사사되고 인현왕후는 복위된 뒤 현숙한 양처의 모범으로 남았다.
    "자영이도 인현왕후님처럼 양처가 되어야지?"
    승호가 집안을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원경왕후님을 닮고 싶은걸요."
    "뭐라?"
    승호는 놀라서 자영을 쳐다보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친정의 힘을 보태 태종을 왕위에 올린 왕비였다. 원경왕후도 여흥 민씨가 배출한 왕비였지만 외척을 견제하려는 태종이 남동생 모두를 죽여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원경왕후님이야말로 태종을 도와 개국하고 조선을 반석 위에 올린 분이시잖아요. 원경왕후님이 낳으신 세종은 위대한 임금이시구요."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 여자들이 문밖으로 나올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자영은 안국동을 찾은 승호의 손위 누이 민 씨에게 인사를 했다.
    "어찌 이렇게 작은 아이가 한양까지 왔느냐?"
    표정이 돌처럼 굳었던 민씨가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영을 반겼다. 깊은 바닷속 진주처럼 완벽하고 단단한 아름다움을 가진 아이였다. 우아하면서도 다부진 눈빛이 부담스러우리만치 사람을 끌어당겼다.
    민씨는 순간 둘째 아들 명복의 얼굴이 떠올랐다.
    ‘명복이도 저 아이처럼 명민하고 기품있는 배필을 만나야 할텐데.’
    "서책에 대한 욕심이 어찌나 많은지. <통감 강목>을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데려왔습니다. 그나저나 어디서 <강목>을 구해야 하나."
    승호는 자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유자화채를 한 모금 마셨다. 잘게 채를 친 유자의 쌉싸름함이 오미자 물의 달달함에 감겨 일품이었다. 아리함을 시원한 배가 흔들었다. 승호는 화채 속에 든 붉은 석류 알맹이를 오독오독 씹었다.
    "자영아 서책이 그렇게 좋으냐?"
    "예!"
    자영은 선하게 생긴 민씨를 보며 생글거렸다. 유자화채를 마신 자영의 입술이 홍화를 바른 듯 붉게 보였다.
    "대궐의 규장각에 가서 놀면 되겠구나. 규장각에는 조선에서 제일 서책이 많으니까."
    민씨는 말해놓고 무안한지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승호는 누이의 웃는 얼굴을 오랜만에 보았다. 흥선군의 등쌀에 웃음기가 없어진 누이였다.
    자영이 물러가자 승호는 누이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따라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돌아 아까부터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자형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이걸 좀 단단히 숨겨줘라."
    민씨는 주위가 조용한지 바짝 귀 기울이다 승호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뭔데요?"
    승호가 보따리를 급히 풀어보려고 하자 민씨가 와락 도로 가져갔다. 그 바람에 보자기가 벌어지면서 안에 든 서책이 삐죽이 나와버렸다.
    "악!"
    민씨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보따리 속 서책은 <天主聖敎工課>(천주성교공과, 19세기 천주교 기도서)였다.
    승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님!"
    승호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 시뻘겋게 변했고 누이의 어깨를 꽉 잡았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뜨거운 숨만 거칠게 나왔다. 민씨는 부들부들 떨며 동생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금세 포도청 포졸들이 방망이를 들고 뛰어들어오는 것 같았다. 천주학쟁이로 몰리면 형틀에 앉혀 쇠사슬로 온몸을 칭칭 묶고 장대로 주리를 틀었다. 두 명이 힘껏 장대에 힘을 주면 다리 가죽이 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됐다. 형틀 아래 초석이 붉게 물들었다.
    민씨는 짧은 순간 수많은 상들이 스쳐갔다. 명복을 키운 유모, 박말다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모는 밤늦게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잦더니 어느 날 ‘천주가사(歌辭)’를 읊조리다 민씨에게 들켰다. 민씨는 흥선군 몰래 유모가 가진 서학 책과 염주(묵주)를 태우려다 우연히 들여다보게 됐다. 결국 책을 불사르지 못했고 유모와 함께 성사에 참여했다. 유모는 커다란 삿갓을 쓰고 포선(직사각형 천 양쪽에 나무를 끼운 얼굴 가리개)을 든 누런 수염의 양인 주교도 만났다.
    "온 집안을 멸족시키렵니까!"
    승호가 이빨 사이로 짐승 같은 신음 소릴 냈다.

    일본 조슈(長州) 번의 하기.
    "리스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하라!"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을 열고 있는 요시다 쇼인은 목청껏 제자들을 가르치다 구석에 쪼그리듯 앉은 리스케를 보고 소리쳤다. 리스케는 다른 학우들이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무사의 아들들이라 주눅이 들었지만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리스케는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조롱박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리스케는 제일 하급 무사 출신이라 교실 안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리스케는 지독하게 가난했던 아버지가 무사에게 입양되는 바람에 하급 무사의 지위를 얻었다.허드렛 일을 하는 시종이 되었을 때는 현관에 꿇어앉아 하염없이 대기하기도 했다. 주인이 가마를 타고 수천 리를 갈 때 리스케는 등짐을 지고 뛰듯이 걸어가야 했다. 리스케의 어머니는 아들을 절에 보내 글을 배우게 했다.
    미국 페리 함대가 막부에 개국을 강요하면서 일본은 크게 흔들렸다. 위기를 느낀 막부는 각 번에 에도의 경비를 지원하라고 명했다. 리스케는 조슈 번이 파견한 경비원에 뽑혀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각 번의 백성들은 허가 없이 살고 있는 번을 벗어날 수 없었다.
    리스케는 그곳에서 구루하라 료조의 눈에 들어 조수가 되었다. 구루하라는 리스케의 자질을 보고 관심을 가졌다. 리스케에게 무사도를 가르쳤는데 말타기를 가르쳐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중급 무사 이하 신분은 승마를 할 수 없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가르쳤다.
    구루하라는 새벽 4시 동이 트기 전에 잠들어 있는 리스케를 깨우고 앉혔다. 촛불을 켜놓고 <논어>와 <맹자> 같은 사서삼경을 가르쳤다.
    "리스케! 무사는 전장에서 짚신이 없을 때도 있다. 그걸 견뎌야하니까 평소에도 맨발로 다니는 훈련을 해라!"
    구루하라는 처남인 기도 다카요시에게 리스케를 쓸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해주었다. 요시다 쇼인에게 보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한 사람도 구루하라였다. 리스케는 쇼카손주쿠에서 훗날 이름을 떨치는 다카스기 신사쿠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을 사귀는 기회를 가졌다.
    리스케의 눈동자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상대의 생각을 재빨리 읽고 몸을 낮추거나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뱀 같이 빠르고 유연했다.
    리스케는 몇 번의 개명을 거쳐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10월 30일 23:00에)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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