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 나, 민자영] (3) 한성(漢城)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0.30 23:00

    [그림자 황후]

    1부 : 나, 민자영

    (3) 한성(漢城)

    자영이 민승호의 집을 나서자, 골목에선 밥을 짓느라 잔가지를 태우는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갓 얼굴을 씻은 듯 말끔한 새벽 공기에 나뭇가지 타는 냄새가 살가웠다.
    자영은 민승호에게 한성을 돌아보고 싶다고 졸라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남은 사내종이 하품을 쩍쩍 해대며 앞장섰다. 자영도 얼굴 구석에 작은 천연두 자국이 남았는데 늘 이를 숨기고 싶어 했다. 사내종의 천연두 자국을 보자 괜히 자신의 자국이 떠올라 고개를 홱 돌렸다.

    쓰게치마의 속 고름을 단단히 잡아맨 자영은 신이 나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주먹을 꽉 쥐어 발을 구르고 튀어 오르고 싶은 걸 참았다.
    ‘한성을 또 언제 와 보겠어!’
    자영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성을 꼭 둘러보겠다고 다짐했다. 한성에 들어온 첫날은 해가 질 무렵이라 제대로 눈에 넣지 못했다.
    자영의 두 눈은 한성을 하나라도 더 보려는 욕심에 바짝 커졌다.

    거리로 나오자 짚을 얹은 삼 간 짜리 초가들이 올망졸망 몰려있어 마치 누런 파도가 일렁이는 듯했다. 그 속에 검은 기와를 얹은 양반집이 솟아, 마치 누런 파도 위를 뛰어오르는 방어 같았다. 초가의 벽은 진흙으로 올려 멀리서 보면 전체가 누르스름한 벌판 같았다.
    ‘정유(貞蕤, 박제가의 호)의 시가 딱 맞네!’
    자영은 얼마 전에 읽은 박제가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가 떠올랐다.
    박제가는 시에서 한성의 모습을 ‘비늘처럼 빽빽이 들어선 기와집 4만 호는 잔물결 속에 숨어있는 방어, 잉어와 같다’고 읊었다. 시를 읽으며 과연 그럴까 싶었는데 바로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골목길은 좁아서 나뭇가지를 집채만하게 짊어진 황소와 사람 한 명만 서면 더이상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좁았다. 골목 도랑에는 집마다 내다 버린 쓰레기가 수북해 악취를 풍겼다. 웃통을 벗은 사내아이들이 먼지가 눌러붙어 털에 주렁주렁 매달린 개들과 깔깔거리며 놀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제법 큰 길이 나왔다. 교꾼들이 교자 위에 목을 빳빳하게 젖히고 앉은 고관을 태우고 숨이 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갓이나 삿갓을 쓰고 흰 도포 자락을 날리며 휘휘 걷는 자들이 많았다. 여자는 쓰게치마를 쓰거나 짐을 머리에 이고 종종걸음 걷는 여자들이 보일 뿐이었다.
    뒷골목으로 접어들자 땔감을 잔뜩 실은 황소, 소금과 곡물을 잔뜩 실은 나귀와 암소에 물통을 실어 나르게 하는 물장수로 북적였다.
    시장에는 길 양옆으로 가게들이 용의 비늘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주에도 방물장수들이 다니기는 하지만, 시장이 이토록 거대하게 펼쳐진 광경은 처음이었다.
    칠패의 생선전에는 숭어와 도미, 소라 등이 깔려 비릿한 내음을 풍겼다.
    "미나리 넣고 푹 끓이면 좋겄네."
    사내종은 혼잣말로 지껄이며 입맛을 다셨다.
    운필(運筆)을 좋아하는 자영은 지전(紙廛, 종이가게)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백지에서부터 설화지(雪花紙) 죽청지(竹靑紙) 화초지(花草紙) 상화지(霜花紙) 같이 여주에서는 보지 못한 색깔과 바탕이 고운 종이들이 잔뜩 있었다. 이것저것 잔뜩 사가고 싶은 욕심이 났다.
    다닥다닥 붙은 좁은 가게에는 짚신, 삿갓, 촛대, 담뱃대, 목침, 부채, 말안장, 곶감, 말린 미역을 내놓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필요하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에누리(호객꾼)가 자영을 힐끔 보더니, 이내 사내종의 팔을 잡으며 서둘러 물었다.
    "필요한 거 없소!"
    사내종이 에누리의 팔을 내치며 따라오지 말라고 팔을 내저었다. 그러자 따라오던 에누리가 이빨 사이로 침을 뱉으며 다른 사람을 잡기 위해 다시 두리번거렸다.
    비단가게 상인은 자영과 사내종을 무심히 쳐다보며 담뱃대를 물었다. 짐을 옮기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사내아이도 비스듬히 서서 담뱃대를 문 채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에구머니!"
    자영은 화들짝 놀라 사내종의 뒤로 숨어버렸다. 뭔가 손을 잡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원숭이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뒤에는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며 재주를 부리게 한 뒤 엽전을 버는 자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쪽에서는 장대를 높이 세우고 재주꾼이 아슬아슬한 어름(줄타기)을 하고 있었다.
    자영은 저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이런 구경 처음이요? 잘 보고 가슈."
    자영은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자 이거 먹어."
    자영은 소매 속에서 말린 곶감을 꺼내 사내종에게 내밀었다.
    "한성에 왔는데 대궐 구경이라도 해보슈."
    사내종이 곶감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말하자 자영은 반가운 마음에 손뼉을 쳤다.

    한성에서 가장 넓은 중앙대로로 나왔다. 태양 빛이 강렬하게 내리쬐어 모든 걸 환히 밝혀주는 듯했다. 불안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안온했다. 알 수 없는 어떤 정기가 둘러싸는 듯했다.
    "저기유 자-알 보슈. 임금이 사시는 대궐이요."
    사내종은 윗입술을 축이며 자영을 내려보았다. 시골 아기씨에게 한성 구경을 시켜주니 제자신도 으쓱해지는 느낌이었다. 아기씨만 아니라면 무등이라도 태워서 보여주고 싶었다.
    "저기가 대궐이라고?"
    자영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물었다. 사내종이 굵고 거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궁궐은 막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듯했다. 날카롭지는 않지만, 상서로운 기운을 타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새의 형상이었다. 세심하면서도 현란한 색채가 눈부셨고 우아하면서도 장중했다. 거대한 문을 지키고 있는 군졸들의 눈빛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긴장감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쏘아보듯 눈빛이 지엄했다.

    자영은 조금이라도 더 대궐을 잘 보려는 듯 까치발을 했다.
    ‘궁궐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 궁궐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아기씨도 저런 데서 살고 싶소? 히힛, 왕비로 간택되면 된다우."
    사내종은 바지춤을 올려 입으며 자영을 내려다보며 농을 쳤다.
    자영은 대궐이 자기 품 안으로 들어오는 환상에 빠졌다. 세상에서 가장 곱고 찬란한 옷을 입고 들어가는 환영을.

    ‘아기씨는 언제 오는 거야?’
    초계는 빨랫감을 가지고 냇가로 가 앉았다.
    나으리의 몸이 급속하게 나빠지자 마님은 한양으로 자영에게 사람을 보냈다.
    "나으리가 안 계시면 난 어쩌지."
    초계는 나으리가 시킨 덕분에 기녀에게 가야금도 배우고 귀여움도 받고 있었는데 돌아가면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계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마님이 다른 데로 팔아버리는 건 아닐까.
    퍽퍽.
    심란해 방망이로 속적삼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저도 모르게 힘주어 두드리다 보니 물이 왈칵 튀어 치마가 젖어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초계는 빨래 감을 물속에 쏟아붓고 발로 밟기 시작했다. 첨벙거리며 빨래를 밟다 미끄러져 물에 그만 빠져버렸다.
    "사람 살려!"
    물에 벌렁 나자빠진 초계가 소릴 질렀다.
    "뭐하는 짓이여!"
    이때 누군가 물에 뛰어들더니 초계의 허리를 끌고 나왔다. 물은 깊지 않았지만 당황한 나머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끌려 나온 초계는 시퍼렇게 질린 채 덜덜 떨었다. 봄이지만 한기가 가시지 않은 물도 차가웠고 온몸이 젖어 드러난 몸이 부끄러웠다. 초계는 황급히 가슴을 가리며 돌아섰다.
    초계를 끌고 나오느라 정강이까지 젖어버린 소년은 초계를 잠시 흘겨보다 곧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커다란 입과 가지런한 이가 퍽 싱그러웠다.

    (11월 6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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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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