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 나, 민자영] (4) 소녀의 슬픔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1.06 23:00

    [그림자 황후]

    1부 : 나, 민자영

    (4) 소녀의 슬픔

    물에 빠져 흠뻑 젖은 초계는 벌벌 떨고 있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몸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초계의 드러난 가슴이 엎어놓은 하얀 박같이 동그랗고 소담스러웠다.
    소년은 재빨리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불을 지폈다.
    "이리 와서 옷부터 말려."
    젖은 채로 길을 갈 수도 없던 초계는 하는 수 없이 불 옆에 비스듬히 앉았다.
    소년은 달수였다. 큰아버지가 여주에서 농사를 살살 넓혀가기 시작해서 정읍에 살던 동생 가족인 달수네를 불러왔다. 큰아버지 집 한 켠에 달수네 가족이 살기 시작했다.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는 달수와 이제 갓 돌을 지난 달수의 동생 호랑이를 귀여워했다. 호랑이는 달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호랑이가 뛰어드는 꿈을 지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가뜩이나 호랑이한테 물려가 죽는 호환이 많은데 호랑이로 지었다며 뭐라 했지만 달수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수령과 아전들의 등쌀에 이를 갈던 달수 아버지는 당장 세간을 싸 들고 여주로 와버렸다.

    "어라!"
    초계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달수는 급히 두건을 벗어 초계의 피를 닦아주었다. 톡 튀어나온 이마가 이뻤다.
    달수가 초계 가까이에 손을 올렸을 때 소녀의 체향이 코끝을 찔렀다. 한 번 잠들면 깨지 않을 달콤한 꿈처럼 아련하고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향기였다. 달수는 키는 크지 않지만 딱 바라진 어깨가 꽤나 넓어 보였다.
    사내라는 게 저런 걸까. 초계는 잠시 멍하니 달수를 바라보았다.
    "저리 비켜!"
    초계는 몸을 빼며 달수를 밀쳤다. 그 바람에 초계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얏!"
    "하하핫 고것 봐라 맴을 잘 써야제. 하하."
    달수는 고르고 튼튼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엉어-."
    초계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라! 왜이랴. 장난으로 그런 것인디."
    달수가 초계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 하자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으앙-."
    울음이 터진 초계는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쿡쿡 쑤시는 엉덩이 때문이 아니었다.
    어제 일이 생각나 울음보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렸다.
    어제 초계는 어머니로부터 마을의 한 노파가 안방마님을 찾아왔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분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씩씩 거리며 초계를 쥐어박았다.
    "이 년아 어느 양반집에서 널 팔라고 왔단다."
    "나를 왜? 뭣 땜에?"
    초계는 날벼락 같은 소리에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그러게 왜 기방엔 기어 들어가 이년아!"
    초계의 어머니도 맥이 풀리는지 쓰러지듯 퍼질러 앉았다.
    "니가 기방을 들락거릴 때 어느 썩을 양반놈이 봤는가 보다 뒤질놈 같으니. 마님이 니년 하는 걸 괘씸히 여기고 있었는데 어쩔 것이야! 아이고 이놈의 팔자야. 팔려가면 그 뒤질놈의 첩이나 될텐데 그 집 마누라한테 머리털 다 뽑히고 죽도록 맞다가 내쫒기면 어쩌누. 아이고 아이고! 새끼라곤 이년 하나밖에 없는데 아이고 어쩌누!"
    초계의 어미는 가슴을 뜯다 바닥을 치며 통곡을 했다.

    초계는 어제 일이 떠올라 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눈앞에서 커다란 검은 눈을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달수가 보였다.
    "울지마여 괜찮을 것이여."
    달수가 꺼칠한 손으로 초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절벽 끝에 선 초계를 어루만져주는 따스한 손이었다. 초계는 달수의 품에 안기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복(復)! 복! 복!(돌아오시오!)"
    지붕 위에 올라간 자가 북쪽을 보며 민치록의 속적삼을 휘휘 흔들었다. 망자의 혼을 부르는 소리는 바람을 타더니 무심히 흩어졌다.
    민치록은 외동딸 자영이 한성에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숨을 거뒀다. 망치로 머리를 때리듯 급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자영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한산 이씨는 울음을 터뜨리다 실신하기를 거듭했다.
    탁탁-.
    사랑채의 아버지가 재떨이에 장죽을 터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경 읽기를 마치고 암송을 잘하면 곶감을 하나씩 내어주던 아버지의 크고 마른 손이 자영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장죽을 터는 소리, 아버지의 손이 동시에 자영에게 몰려들었다.
    ‘아버님. 제가 해드릴 게 많았는데 왜 벌써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 자영은 자신이 지붕 위에 올라가 아버지를 부르면 다시 살아돌아오실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아버님을 살려주세요 제발!’
    자영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느라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어머니와 난 어떻게 되는 걸까. 노비 놈들은 죄다 달아나지 않을까. 집 집마다 도망친 노비를 잡아댄다고 난리들인데. 제사를 위해 양자를 들이면 이 집 재산도 양자에게 다 넘어가겠지. 한산 이씨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민자영 정신 차려!’
    자영은 손에서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흥 민씨 문중 사람들이 모여 민치록의 소렴(小斂, 고인의 시신을 깨끗이 씻고 새 옷인 수의를 입히는 것)을 준비하면서 양자 문제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민치록은 미처 양자 들이는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자영은 삼베로 지은 커다란 소매와 폭이 넓은 대수장군에 머리에는 개두(여성이 상복 입을 때 머리에 쓰던 쓰개)를 쓰고 수질(상중에 머리에 두르는 띠)을 두른 채 앉아있었다. 자영의 귀에 ‘치구의 아들 승호’ ‘양자’라는 말이 들려왔다.
    자영은 일어나 문중 사람들에게로 나아갔다.
    두 다리가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듯했다.
    "저도 아버지 소렴을 하겠습니다."
    "뭐라고?"
    사람들은 열 살도 되지 않은 계집아이가 죽은 아버지의 소렴을 하겠다고 나서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아이야 그건 어른들이 할 일이다."
    집사자(상례를 주관하는 자)는 자영을 측은하게 보며 잘 타일렀다.
    "어린아이가 볼 일이 아니다. 어머니한테 가 있거라."
    "아닙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자식이라곤 저 혼자이며 어머니는 슬픔을 가누기 어려우시니 제가 상주 노릇을 하겠습니다."
    "허허! 거 참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니까!"
    자영은 문중 어른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자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조선에서는 일찌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딸도 아들과 번갈아가며 제사를 모셨습니다. 지금은 상례가 바뀌었지만 전혀 전례가 없던 일이 아닙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소녀가 본 분재기에 따르면 딸에게도 아들과 똑같이 분재를 하지 않았습니까?"
    자영은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집안의 오래된 분재기(分財記, 자녀들에게 상속하는 것을 기록한 것)를 본 적이 있었다.
    분재기에 아들과 딸이 똑같이 전답은 물론 노비까지 고르게 상속한 걸 보고 크게 놀랐었다. 100년 전 일이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전에는 족보에 딸 이름과 외손자 외손녀 이름까지 올렸다며 입맛을 다셨었다.
    민치록은 그 말로 딸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를 위로했던 것이다.
    "거참 맹랑한 것 같으니라고! 거 밖에 누구 없소? 이 아일 데려 나가소!"
    "주자의 가례만 아시고 어찌 조선 전례에 대해서는 어두우십니까?"
    자영은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민씨들은 분재기까지 봤다는 자영의 말에 더이상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밀려드는 문상객들 보기에도 민망했다.
    "에잇! 알았으니 정 원하면 소렴을 하거라!"

    (11월 13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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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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