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1.13 23:00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달수는 지게를 지고 가면서 자신이 어디를,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강씨 집에 쌀을 팔러 가라는 큰아버지 말을 듣고 지게에 쌀을 얹었다. 이후부터는 자신의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위에 무엇이 지나가는지 전혀 몰랐다.
    오직 초계의 체향 만이 코끝에서 맴돌았다.
    빨리 걷기 뒤해 논두렁을 걷다 발을 헛디뎌 자빠질뻔했다.
    초계의 암팡진 눈매와 통통한 목, 앞섶이 벌어진 저고리가 계속 어른거렸다.
    그럴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다리속곳을 단단히 조여 매야 할 판이었다.
    ‘초계 고것이 백여시여.’
    달수는 제 뺨을 철썩 갈겼다. 정신을 차리자.
    달수는 빨리 강씨에게 쌀을 넘기고 냇가로 달려갈 참이었다.

    강씨는 곱상한 티가 남아있는 한미한 양반가 여자처럼 보였다. 종들은 보이지 않고 강씨가 직접 나와 쌀을 받았다.
    강씨는 쌀값이라며 마루에 놓인 베 1필을 가리켰다.
    "고것이……."
    달수는 등에서 땀이 났다. 큰아버지가 베로 가져올 경우 적어도 2필은 받아와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던 것이다.
    "두 필은 주셔야 한당게요."
    달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형편이 그러질 못하니 어쩌겠느냐."
    강씨는 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낙담한 듯 말했다. 강씨는 늙수그레한 서가 놈이 나타날줄 알았는데 어리지만 다부진 어깨와 다리를 가진 달수를 보자 은근히 반가웠다.
    "부족하겠지만 이걸로 대신 가져가거라."
    강씨는 소매 안에 손을 넣더니 뭔가 쑤욱 꺼냈다.
    눈같이 새하얀 백자 위에 청화로 꽃을 그린 연적 같은 것이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고 이쁜 기물이었다. 네 개의 꽃잎을 단 작은 꽃 5개가 그려진 귀하고 앙증맞은 백자였다.
    "농사짓는 놈이 연적을 엇다 쓴디요."
    달수는 탐이 났지만 큰아버지에게 쥐어박힐 생각을 하니 울상이 되었다.
    "이놈아 이건 연적이 아니야. 분수기(粉水器)야."
    "분수기요? 분수기가 뭔디요?"
    달수는 코를 씰룩하며 퉁명스레 물었다. 초계를 생각하면 일각이 아까웠다. 여기서 이렇게 머무를 새가 없었다.
    "분을 갤 때 물을 조금씩 따라 붇잖아, 그때 붇는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야 이 녀석아."
    강씨는 달수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줄 알아? 임금님이 쓰는 왕실 가마에서 나온 것이야 이 녀석아."
    그제서야 달수는 분수기란 것을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안 되여라. 큰아부지한테 디지게 맞아부러……."
    그때 강씨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게 어떤 건지 알고 니눔이 흑흑흑."
    강씨는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다.
    끝까지 간직하고 싶었던 분수기를 내놓을 수밖에 없던 자신이 한스러웠다.
    옛일이 떠올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전답도 노비도 거의 없어진 양반집에 시집온 강씨는 5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나이 스무 살이었다. 아이도 없이 청상과부가 된 강씨는 집에 갇혀 베 짜는 일로 가사를 보탰다.
    유일한 낙이라면 한 달에 두어 번 근처에 사는 사촌 언니네 집에 밤마실 가는 일이었다. 양반가의 딸이지만 부유한 역관의 집에 시집간 사촌 언니는 풍족하고 자유로웠다. 밤마실에는 자신처럼 과부가 된 또래의 홍씨, 사촌 언니와 둘러앉아 세 명이 낄낄대는 시간을 가졌다. 사촌형부는 역관인지라 장기 출타가 많아 여인네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글도 읽을 줄 아는 사촌 언니의 성격은 거침이 없었다.
    "월창(月窓)아!"
    사촌 언니가 꿀에 떡을 찍어 입에 넣던 강씨를 월창이라고 불렀다.
    "월창이가 뭐야? 기생 이름같이."
    "내가 지은 네 호(號)다. 가여운 것! 그럼 과부댁이라 부르랴? 창에 뜬 달이나 보며 사내를 그리워할 게 뻔하니 월창이라 부르련다 호호호."
    "아이참 언니두!"
    강씨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성을 냈지만 곧 웃어 넘겼다.
    사촌 언니는 홍씨가 측간에 간 틈을 타 두툼한 손으로 좌경(座鏡) 밑에서 뭔가 꺼냈다.
    "이거 가져가라 월창아."
    사촌 언니가 내놓은 것은 사내 엄지만한 토우(土偶)였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와 남자가 벌거벗고 있는 토우였다.
    "어맛 이게 뭐야?"
    월창은 화들짝 놀라며 받은 토우를 사촌 언니한테 던지듯 줬다.
    "망칙해 언니!"
    "우리 집 언년이가 나물 캐다가 산에서 주운 거야. 조선 때 것은 아닌 것 같고. 옛날 사람들은 이런 것 같고 놀았던가 보다 호호호."
    사촌언니는 벌거벗고 있는 남녀 토우상을 손으로 쓰윽 문지르더니 강씨의 소매 안에 깊숙이 넣어줬다.
    이때 홍씨가 들어오며 엎어지듯 앉았다.
    "나두 보여주소!"
    밖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은근히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씨는 하는 수 없이 토우를 꺼내 홍씨에게 보여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촌언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장죽을 강씨에게 내밀었고, 강씨는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여줬다.
    "그럼 이거 내가 가져갈까?"
    홍씨가 눈을 반짝이며 강씨의 눈치를 살폈다.
    "그건 월창이한테 준 거니 놔둬. 다른 거 생기면 그때 줄게."
    사촌 언니가 장죽을 재떨이에 탁탁 두드리며 막았다.
    "나두 밤마다 창에 뜬 달 보며 눈물로 지샌다구!"
    홍씨는 아깝다는 듯 토우를 두 손으로 한번 꼭 쥐어본 뒤 넘겨줬다.

    "흥 월창이는 이래저래 좋겠다."
    "과부 팔자가 뭐가 좋아! 어린 것이 얼마나 가여운지."
    사촌 언니는 장죽을 깊숙이 빨며 홍씨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같이 따라온 몸종이 그러는데 월창이 옆집에 사는 홀아비가 월창이에게 홀딱 반했다던데."
    "뭐야!"
    강씨는 너무 놀라 소릴 질렀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농을 해도 참."
    옆집에 홀아비가 산다는 말은 들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더 눈에 불을 켜고 강씨의 몸가짐을 감시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 홀아비가 자신을 흠모하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가슴이 사정없이 뛰어 가슴이 답답했다.
    "뭐라고? 자세히 말해봐."
    사촌 언니는 장죽을 치우고 당겨 앉았다.
    "하이고 이제야 대접이 달라지네. 차가 다 식었수."
    사촌 언니는 여종을 불러 안주와 죽엽주를 내오라고 했다.
    "오랜만에 재미난 얘길 들으니 기운이 나네. 한 잔씩들 하자."
    "어머님 아시면 불호령 떨어져."
    강씨는 손을 내저었다.
    "더 웃긴 건 그 사내가 꽤나 미끈하게 생겼다고 하네. 어머 이게 죽엽주요? 입안에 착 감기네."
    홍씨는 어포를 죽 뜯으며 죽엽주를 홀짝 거렸다.
    "하여튼 담장 너머로 봤는지 월창이 한테 마음이 홀딱 뺏겨 버렸대."
    귓볼까지 빨개진 강씨는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홍씨에게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강씨는 시어머니의 눈치를 더욱 살폈다.
    되도록 일찍 잠자리에 들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괴로웠다. 긴 밤이 더욱 길어졌다.
    월창.
    ‘달은 내 마음을 알아줄까.’
    스무 살 강씨는 그 날밤부터 옆집에 산다는 미끈한 선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11월 20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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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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