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1.20 23:00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해가 떨어지자 찌는듯한 더위가 물러서는 듯했다.
    시어머니 황씨가 불공을 드리러 가자 계집종마저 휴가를 받아 훌렁 나갔다. 혼자 집을 지키게 된 강씨는 오랜만에 맘편히 몸을 씻기로 했다. 커다란 나무통에 뜰에 핀 꽃을 꺾어 물에 띄웠다. 꽃 향이 코끝을 스치더니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물속에서 긴 머리카락이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차고 맑은 물 속으로 들어가 자맥질을 하는 소녀처럼 천천히 부드럽게.
    따뜻한 물이 강씨의 몸을 어루만졌다.
    봉긋 떠오른 보름달이 강씨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희고 둥근 어깨와 미끈한 다리를 고루 애무했다.
    강씨는 달빛에 취해 잠이 들것 같아 나무통에서 나왔다. 배꽃같이 흰 몸을 속곳과 가슴가리개로 둘렀다.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보름달이 강씨의 몸을 눈부시듯 훑어내리고 있었다.
    강씨는 방으로 또르르 기어들어갔다. 보자기에 고이 싸두었던 대슘치마를 펼쳤다. 스란치마를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 입는 속치마로 얇디얇아 속이 훤히 비쳤다. 대슘치마를 입으니 눈부신 여체가 여리여리하게 비쳤다. 강씨는 그대로 마루에 누워버렸다.
    "놀라지마시오!"
    "엑!"
    강씨는 후다닥 일어나 가슴을 가렸다.
    "헉 누구요!"
    강씨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속적삼을 주워입었다.
    "도, 도도둑"
    "쉿!"
    나무 밑에서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상투를 튼 얼굴이 상아처럼 맨질했고 코가 오똑하니 시원하게 뻗었다.
    "쉿! 제발 옆 집에 사는 홍가라고 하오. 놀라게 해서 미안하오."
    사내는 날 듯이 다가와 강씨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제발 해치려는 게 아니니 큰소리만 내지 마오. 제발 제발 이렇게 빌겠소."
    사내는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했다.
    강씨는 순간 옆집에 산다는 홀아비가 이 사람인가 싶었다.
    달빛에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들은 대로 미끈했다.
    "제발 해치려는 게 아니오. 안심하오."
    사내는 싹싹 빌던 두 손을 어느 틈엔가 강씨의 다리에 올려두고 애원했다.
    강씨는 정신없이 옷을 챙겨입었다. 몸을 돌린 채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여자 혼자 있는 집의 담을 넘었소!"
    가슴이 아직도 뛰고 있었다.
    "내 전부터 그대를 흠모하고 있었소. 오늘 달빛이 너무 좋아 마당을 거닐다 물소리가 나길래."
    이때 사내가 뒤에서 강씨를 와락 껴안았다.
    "이 이거 놓으시오!"
    "내 맞아 죽어도 더 이상은 내 마음을 숨기지 않으리다."
    사내가 강씨의 촉촉한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사내의 눈가에 물기가 묻었다.
    "날 거부한다면 여기서 아예 맞아 죽겠소!"
    사내가 강씨의 두 손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밤낮으로 베 짜고 바느질 해대느라 고생하는 걸 보면서 속이 탔었소. 서럽고 힘든 밤을 내가 왜 모르겠소."
    순간 강씨의 몸이 찌르르했다.
    "이 손 놓으시오! 나는 일부종사할 몸이요. 어찌 몸을 더럽히겠소!"
    "외로웠을 거요!"
    사내가 강씨를 힘주어 안았다.
    막대기를 들고 달려들 시어머니와 가문을 더렵혔다고 쫒아 낼 아버지, 침을 뱉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내 보쌈을 해서라도 그대를 데려올 것이오!"
    ‘아!’
    강씨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마음에 둔 과부를 보쌈이라는 이름으로 암암리에 데려간다고는 들었다.
    "이걸 주고 싶었소."
    사내는 뭔가를 강씨에게 쥐어 주었다. 조약돌같이 하얀 분수기(粉水器)였다.
    "아직 어린데 이 고운 얼굴이……."
    강씨는 순간 쩍쩍 갈라진 논같이 메마른 하루하루가 엄습해왔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달이 넘어갈 때까지 바느질로 하루를 보내는 나날. 그 지리한 하루가 쇳털 같이 많이 남았다는 게 더 숨 막혔다.
    "그 약조 잊지 마세요."
    강씨는 눈을 감았다. 그날 밤 강씨의 머릿속에 화염이 터지고 천지 사방에 별이 쏟아졌다.

    강씨의 하루는 이제 달라졌다.
    좌경(座鏡)을 보는 일이 잦아졌고 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분수기를 꺼내 어루만졌다. 그때마다 그날밤의 희열이 불꽃처럼 살아났다. 화색이 돌고 바느질하는 손도 빨라졌다.
    저녁을 물린 시어머니가 시원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이제야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자겠다."
    "왜요 어머니?"
    "눈이 늑대같이 교활해 보이던 옆집 홀아비가 한양으로 떠났다는구나."
    바느질하던 강씨의 손이 툭 떨어졌다.
    "한양서 꽤나 산다는 집에서 처를 얻어 산다나. 고놈 잘 갔다 잘 갔어."
    시어머니는 주름진 얼굴이 펴지도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어.’
    강씨는 그날 이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앓았다. 강씨가 겨우 기운을 차리자 이번엔 시어머니가 갑자기 타계했다.
    상을 치르면서 그나마 남았던 재산마저 바닥이 드러났다.
    강씨는 분수기를 달수에게 건네며 오열했던 것이다.


    그날 밤 사촌언니가 예사롭지 않은 품새를 갖춘 여인과 들이닥쳤다. 흰 얼굴에 행동거지가 품위가 있었다.
    "월창아! 에구 이게 무슨 꼴이야!"
    강씨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사촌언니와 여인을 쳐다보았다.
    "누구신대."
    "인사 드려라 선택이 고모님이시다."
    강씨는 그제서야 첩지를 한 여인이 오 상궁이란 걸 알았다. 역관인 형부의 누이가 대비전의 상궁이라고 들었다. 오 상궁은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강씨를 살펴보았다.
    "네 사는 게 막막할 것 같아서 고모님을 모셔왔다. 대비전에서 궁체 잘 쓰는 궁녀를 급히 구한다고 하기에 모시고 왔어."
    "역시 나이가 너무 들었어."
    오 상궁은 머리를 저었다.
    "열두 살 열세 살 정도에 들어와 궁중 법도도 익히고 해야하는데."
    "이제 갓 스물 지났는데요 뭘. 아휴 예까지 오셨으니 글 솜씨나 보고 가세요."
    사촌언니가 애가 타서 졸랐다.
    대비전에서 당장 문안편지와 궁중발기(필요한 물품의 목록과 수량을 적은 문서)를 써야 하는 궁녀가 없어 발을 구르고 있었다. 나이든 한 상궁이 갑자기 죽은 데다 뒤를 이은 궁녀가 병을 얻어 출궁하는 바람에 상황이 급했다. 대비마마는 바깥과 긴밀하게 주고받을 봉서가 많다며 서사 궁녀를 빨리 대라고 성화였다.
    "어디 솜씨나 한번 보자."
    오 상궁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비마마는 글씨를 까다롭게 보는 편이라 보통 솜씨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강씨는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긋지긋한 집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궁체를 잘 쓰기로 소문난 강씨였다.
    정성스레 먹을 갈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흰 속치마를 마루 한가득 펼쳤다.
    강씨는 무엇에 홀린 듯 언문을 써내려갔다. 어린 소녀의 해맑은 얼굴 같은 궁체가 방긋방긋 웃는듯 유려하게 흘렀다.
    "흐음……."
    오 상궁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비마마가 아끼던 한 상궁의 절정기 필체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절제되고 견고했다. 저 정도라면 제조상궁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을듯 싶었다.
    "궁중이 궁금(宮禁)인줄은 아느냐?"
    "예?"
    강씨의 등에 땀 줄기가 흘러내렸다.
    "궁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를 어기면 뼈가 부서져라 장을 맞고 심하면 목을 매달아 죽어 나가지. 견딜 수 있겠느냐?"
    얼굴이 창백해진 강씨가 마른침을 삼켰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입궁 시기를 택해서 빨리 들어오거라."

    (11월 27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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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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