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원의 오덕이야기] (150)마징가 작가의 묵시록 '데빌맨'

입력 2020.11.21 12:49 | 수정 2020.11.22 12:05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만화 ‘데빌맨(デビルマン)’은 악마로 인해 혼돈에 빠진 세상, 신과 사탄의 싸움으로 인한 세상의 종말과 창세기를 다뤘다. 섹스 등 가감없는 성(性)에 대한 표현과 신체훼손 등 폭력 연출, 절망적이면서도 슬픈 결말 등이 당시 만화를 접했던 많은 독자들의 뇌리에 지금도 큰 흔적으로 남았다.

데빌맨 일러스트. / 야후재팬
데빌맨을 탄생시킨 인물은 ‘마징가Z’, ‘겟타로보', ‘큐티하니'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나가이 고(永井豪)다. 한국에서는 나가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마징가Z’를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본에서는 나가이의 최고 작품으로 ‘데빌맨'을 꼽는다. 원작자 자신도 ‘데빌맨' 집필 전과 후로 작품의 성향이 나뉠만큼, 데빌맨에 대해 강렬한 인상이 남았다고 밝힌 바 있다.

데빌맨이 그린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창세기는 많은 창작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데빌맨 이후 등장한 많은 작품이 데빌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현지 만화·애니업계 시각이다.

데빌맨 영향을 받아 세상의 종말과 창세기를 그린 대표작은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이다. 작품을 탄생시킨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감독은 에반게리온 관련 서적 인터뷰를 통해 데빌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만화가 나가이 고의 빠른 스토리 전개, 전달력 있는 대사, 사실적인 배경묘사와 장면에 따라 한 페이지에 한 장면만을 그려내는 연출 등 만화 기법은 ‘란마1/2’, ‘이누야샤'로 유명한 인기 만화가 타카하시 루미코(高橋留美子)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데빌맨 애장판 단행본5권 일러스트. / 아마존재팬
원작자 나가이에 따르면 만화 ‘데빌맨'은 집필 당시 ‘호러'를 테마로 그려졌다. 만화와 함께 시작한 TV애니메이션과 달리 독자층을 대학생 등 성인으로 설정하고 만들었다. 만화는 연재를 거듭하면서 묵시록과 유사한 장대한 구성과 스토리로 변화됐다. 만화 마지막 부분에 그려진 천사군단이 날린 작은 빛의 덩어리가 몸둥이 반쪽을 잃고 죽은 주인공 아키라와 그를 사랑하고 만 사탄을 소멸시키고, 암흑으로 변한 세상에서 성서가 닫히는 이야기 끝맺음 연출은 작가 자신도 만족스럽다는 입장이다.

작가 자신에게마저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데빌맨'의 세계관은 이후 등장한 만화 ‘바이오렌스 잭'과 ‘데빌맨 레이디' 등에 의해 확장된다.

‘바이오렌스 잭'은 거대지진으로 파괴돼 무법지대로 변한 세상을 그렸다. 원작자 나가이는 ‘세기말 악마사전' 책 인터뷰를 통해 "데빌맨으로 세상의 파멸을 그렸고, 바이오렌스 잭을 통해 파괴된 세상에서 다시 일어서는 민중(民衆)의 에너지를 그려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소설가 유메마쿠라 바쿠(夢枕獏)는 나가이의 ‘바이오렌스 잭'이 영화 ‘매드맥스'보다 앞서 세기말적인 세계관을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즉, 세기말 주제 만화 대표작이면서도 매드맥스 영향을 받았다 평가받는 ‘북두의권(북두신권)’도 데빌맨과 바이오렌스 잭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1997년 공개된 만화 ‘데빌맨 레이디'는 싸움에 대한 욕구가 강한 여교사 ‘후도우 쥰'이 데빌맨으로 각성해 괴물(비스트)들을 차례차례 무찌른다는 내용을 담았다. 만화에는 데빌맨 주인공인 아키라가 이야기 중반부터 등장하는 등 만화 데빌맨의 후일담 적인 내용을 담았다. 만화가 나가이는 ‘데빌맨 레이디'가 데빌맨군단과 데몬군단의 최종결전(아마게돈) 이후 신들에 의해 재생된 세계를 무대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 1970년대 애니메이션은 만화와 다른 내용 담아

1972년작 만화 ‘데빌맨'은 TV애니메이션과 함께 출범했지만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원작 만화는 진한 폭력성과 처절한 스토리를 담았지만, 어린이도 보는 TV애니메이션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데빌맨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 야후재팬
1972년 토에이(東映動画)를 통해 제작돼 현지 방영된 TV애니메이션 ‘데빌맨'은 따뜻한 사람의 마음을 가진 악마 데빌맨이 인류멸망을 꾀하는 데몬족에 맞서 싸운다는 영웅 이야기로 기획됐다. 1970년대 TV애니메이션 답게 하나의 주제를 1개의 회차에서 마무리짓는 ‘1화완결' 스타일로 구성됐다.

원작 만화에서 데빌맨은 신에게 반기를 든 데몬족에 맞서는 ‘아몬'이 인간 주인공과 일체가 되는 형태로 데몬의 힘을 가지고 자아를 갖춘 인간이지만, TV애니메이션의 경우 주인공 아키라가 정신도 육체도 모두 데빌맨에게 흡수된 ‘인간의 모습을 한 데몬'이다. 애니 주제가에서도 나오듯 ‘데몬족의 배신자 데빌맨이 인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내용으로 시나리오가 꾸며졌다.

TV애니 ‘데빌맨'은 만화와 다른 내용을 담았지만 ‘권선징악만으로 끝나지 않는 씁쓸한 스토리'와 블랙코미디가 섞인 이야기 흐름 등 원작자 나가이의 작품 특색이 애니메이션에서도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데빌맨과 데몬족의 싸움이 결말을 맺지 못한채 끝났고, 당시 TV애니 종영 4개월 뒤 공개된 영화 ‘마징가Z 대 데빌맨'에서 데몬족과의 결투가 이어지는 모습을 비췄다.

데빌맨은 TV애니 종영 이후 몇 번에 걸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1987년에는 오리지널비디오애니메이션(OVA)로 ‘데빌맨 탄생편'이 그려졌고, 1990년에는 여성의 몸을 가진 요괴새 시레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요도시레누(妖鳥死麗濡)편'이 제작돼 공개됐다.

2000년에는 원작 만화와 비슷하게 주인공의 주변인물이 참살 당하고 데빌맨과 사탄의 대결을 그린 ‘아몬 데빌맨 묵시록(AMON デビルマン黙示録)’이 출시됐다. 이 밖에도 소설과 게임, 실사영화 등 데빌맨을 소재로 다양한 콘텐츠가 등장했다.

데빌맨 크라이베이비 일러스트. / 야후재팬
원작자 나가이 고가 그린 만화 내용에 가장 가깝게 내용이 구성되고 가감없는 성에 대한 연출과 폭력성을 연출한 작품은 2018년 등장한 넷플릭스 독점작 ‘데빌맨 크라이베이비'다.

유아사 마사아키(湯浅政明) 감독이 그려낸 이 작품은 독창적이라 평가받는 만화 원작을 지금의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여주인공 미키의 오체분리참살 장면을 가감없이 표현하고, 원작 마지막 장면인 데빌맨과 사탄의 결투, 아키라의 죽음과 사랑했던 남자를 잃은 사탄의 슬픔, 세상의 종말과 신에 의해 세상이 소멸되는 장면 등이 담겼다.

원작자 나가이 고는 현지 매체(IT미디어) 인터뷰를 통해 "‘악마는 사람을 얼마든 죽여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등 유아사 감독의 추상적인 표현이 원작의 본질적인 부분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에 만들어졌던 데빌맨의 이야기가 지금도 사람들에게 통한다는 점에서 원작에서 그리고자 했던 방향성이 지금시대에도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나가이는 또 "표현에 대한 제약이 없었던 것이 작품성을 높였다. 섹스 장면 등은 이전까지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낼 수 없던 연출이다. 창작에 대한 자유도가 낮고, 제약이 심했다면 만들어내지 못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김형원 기자 otakuk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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