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대표시네요?"
얼마전 모 업체에 새로 부임한 홍보담당자를 만났다. 그가 건넨 명함을 받고 다소 난감했다. 이 회사는 모든 직원을 ‘대표'라고 부른다. 호칭 파괴다. 사내에서 ‘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대외적으로는 프로, 수석과 같은 직급을 사용하는 기업은 여럿 봤지만, 대표는 처음이다. 어색할만도 한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한다. 오히려 상대의 직급이 뭔지 몰라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고민할 일이 없으니 업무에 적응하기가 좋다는 평가다. "그럼 저는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까요?"

또 다른 외국계 IT기업도 최근 호칭 파괴에 나섰다. 이미 상당수의 외국계 IT기업이 호칭파괴를 도입한 것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는 듯도 하다. 그렇지만 최근 도입에 앞서 내부적으로 의견수렴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다. 이 회사는 대표를 포함해 C레벨들이 적극적으로 ‘님’ 호칭을 사용한다. 자연스럽게 모든 직원들이 이 호칭을 사용한다.

"대표께서 님이라는 호칭을 편하게 사용하시니까, 이전보다 업무 관련된 의견을 드리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내부의 반응은 어떤지 이 회사 직원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대외적으로는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물었다. 대표, 본부장, 팀장, 매니저를 쓴다. 제법 간결하다. 외부 업체들은 해당 인사가 승진한 줄 모르고 상무를 부장이라 불러서 실례하게 될 일도 없을 테고, 새로 입사한 직원도 임직원의 직급이 뭔지 몰라 호칭하지 못하고 피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호칭 파괴의 사례는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CJ를 필두로 삼성, LG, SK 등 대기업이 앞장섰고, 최근에는 전통적인 금융권도 이에 동참할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호칭 파괴가 이제는 낯설지 않을 정도다. 물론, 사원으로 입사해 대리로, 과장으로 승진하는 그 재미를 봤던 4050세대에게는 한편으로는 아쉬우면서도 여전히 낯선 맞닥뜨림이다. 부장 승진을 앞두고 직급체계 간소화로 부장을 부장이라 불리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는 모 기업 A씨. 그도 지금은 프로라는 새로운 호칭에 아쉬움을 털고 잘 지내고 있을 터다.

코로나19로 인해 촉발된 어쩔 수 없는 비대면 시대의 일상화에서 소통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되고 있다. C레벨의 잔소리 정도로 들렸을지 모를 ‘소통'의 중요성을 비대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네 직장인들은 몸소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대면 상황에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윗분들을 비대면 상황에서는 마주할 일이 더욱 줄어들지 않겠는가. 사내에서 오며 가며 직원들간 나눴던 아이디어도 비대면 시대에는 소홀해 진 것이 아닌가도 싶다.

저마다의 이유는 있겠지만 호칭 파괴를 도입했다가 기존 체계로 복귀한 기업의 사례를 보면 호칭 파괴가 기업의 수평적 조직문화를 이루는 정답은 아닐 것이다. 비단 호칭 파괴가 아니더라고 수평적 기업 문화 속에서 원활한 소통의 문화를 실천하는 기업도 있을테니 말이다. 수직적 문화가 여전한데 호칭 파괴를 도입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은 기업도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생존을 모색하려면 디지털 전환해야 한다고들 부르짖는다. 디지털 전환에 선도적인 기업들은 이를 위해서는 IT기술의 도입도 중요하지만 기업문화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단 호칭 파괴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호칭 파괴는 극히 일부분의 수단일 뿐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 도출과 빠른 의사소통을 중요시하는 수평적 조직문화가 호칭 파괴라는 수단을 통해 완성될 것만은 아닐 것이다. C레벨의 적극적인 의지와 실천 없이는 안될 테니 말이다.

2021년이 코 앞이다. 내년 전망을 묻는 이들은 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들 한다. 코로나19가 종식된다고 해도 원격근무와 같은 비대면 환경이 자리 잡아갈 것이라는 얘기다. 그에 맞게 일하는 방식도, 이를 대하는 임직원들의 마음의 자세도 변화해야 할 것이다.

이윤정 디지털테크팀장 ityoo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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