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2.04 23:00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정신 바짝들 차리거라! 혹여라도 실수할 경우 매로 다스릴 것이야!"
    궁궐의 침방(針房) 나인들은 상공(尙功· 정6품 상궁)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나인들은 새 임금이 즉위례에 입을 대례복을 짓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 임금의 용금치(용포)와 누비옷 등 할 일이 태산이었다.
    한겨울이라 따뜻한 솜을 넣은 세(細)누비 옷도 필요했다.
    침방 나인들은 좁쌀보다 더 조밀하게 누벼야 하는 세누비를 앞에 두고 한숨을 지었다.
    당분간 격일 교대는 꿈도 못 꾸었다.
    수방(繡房) 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례복인 구장복(九章服)의 용을 가장 정교하고 화려하게 표현해야 했다.
    열 살 무렵 생각시로 궁에 들어와 바늘과 색실로 세상을 배운 나인들이었다.
    바늘과 실로 세상 어떤 것도 창조해낼 수 있는 손이었다.
    살을 파고들 것 같은 용의 발톱과 물방울을 튕기며 날아오르는 용 비늘도 침방 나인들의 손에서 생명을 얻었다.
    바늘과 금실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오묘한 기운과 왕실의 영광을 드러냈다.

    대비전의 지밀(至密)상궁이 침방과 수방 나인들을 바짝 조였다.
    지밀은 대비를 모시는 측근으로, 침방과 수방과 달리 다섯 살부터 궁에 들어와 법도를 익혀야했다.
    대비의 언문 편지와 교지를 쓰는 서사상궁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궁체가 아름다워 대비의 귀여움을 받고 있는 월창도 때를 만난 듯 각오를 하고 있었다.
    입궁 시기는 늦었지만 궁체가 단아하고 손이 빨라 대비가 자주 불렀다.
    무수리들은 윗전인 나인과 상궁들의 눈치를 살피며 속닥였다.
    창덕궁은 새 임금을 맞이하는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궁궐을 지키는 금군(禁軍)은 경비를 두텁게 했고, 수문장은 궁문을 출입하는 자에 대한 단속을 까다롭게 했다.
    왕궁을 드나드는 신하들은 새 소식을 하나라도 더 듣고 싶어 마음이 바빴다.


    "명복아!"
    흥선군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명복을 불렀다.
    "네 아버님."
    흥선군의 옆에는 부인 민씨가 촉촉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민씨는 얼른 아들의 통통한 손을 꼭 쥐었다.
    다시는 맘 놓고 잡아볼 수 없을 것이다.
    순간 눈물이 치마 위로 툭 털어졌다.
    "흠흠."
    흥선군이 민씨에게 헛기침을 했다.
    흥선군은 거무스레한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들 명복을 응시했다.
    "내 말 잘 듣거라. 너는 오늘부터 궁에 들어갈 것이야."
    "예?"
    명복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나라의 임금이 된다."
    "무슨 말씀인지요. 어머니-."
    명복은 영문을 몰라 만만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오늘부터 너의 어머니는 대비마마이시다 명심하거라!"


    조대비로부터 명복을 왕궁으로 맞아들이라는 명을 받은 영의정 김좌근이 도승지 민치상 등과 함께 흥선군의 집으로 갔다.
    흥선군의 집은 기와가 내려앉고 마당에는 바싹 마른 나뭇잎과 먼지가 나뒹굴었다.
    도승지 민치상이 대비의 교서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
    명복은 무릎을 꿇고 상 앞에 앉았고, 그 앞에서 민치상이 교서를 읽었다.
    명복은 교서가 놓인 상을 향해 4번 절한 뒤 교서를 받아들었다.
    명복이 복건과 도포로 갈아입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나와 가교(駕轎· 말이 끄는 가마)에 올랐다.
    매서운 추위에도 흥선군의 집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갓 아래 털을 단 남바위를 쓴 양반은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갓을 부여잡았다.
    쓰개치마를 두른 양반집 부인과 얹은머리를 한 여자들은 뒤섞여 까치발을 했다.
    챙이 넓게 퍼진 전모를 쓴 기생은 고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자리를 지켰고 삿갓과 패랭이를 눌러쓴 남자들은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땋은 머리를 늘어뜨린 소년들도 뒤질세라 비집고 들어왔다.
    미투리를 신은 유생들은 발이 시려워 동동 구르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먼지를 뒤집어 쓴 개들은 주변을 맴돌며 컹컹 짖어댔다.

    ‘헉!’
    명복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줄지어 선 백관들과 맞닥뜨렸다.
    명복은 다시 가교에서 내려 이번엔 가마꾼이 메는 여(輿)로 갈아탔다.
    명복을 태운 가마가 돈화문의 작은 문을 지나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는 바람에 창덕궁이 정궁으로 쓰이고 있었다.
    세련된 단청의 화려함이 눈을 압도했다.
    화강암을 세심하게 손질해 깐 어도(御道)는 자신이 걸어가야할 길에 대한 막연한 암시를 던져주었다.
    지붕 처마 끝에 올려진 작은 신상(神像)들이 명복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난간에 용(龍)이 조각된 금천교(禁川橋)를 지났다.
    금천교는 신하들이 다리를 지나면서 맑은 물에 사심을 씻어내고 공명정대한 길로 걸어야 한다는 걸 상기시키는 다리였다.

    처소로 온 명복에게 내관과 상궁이 인사를 올렸다.
    "황 내관이라 하옵니다."
    "김 상궁이라 하옵니다."
    명복은 모든 게 낯설고 고단해 눈이 빠질 것 같았다.
    ‘모든 걸 조심 또 조심하거라.’
    귀에는 아버지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맴돌았다.
    명복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동무들이 자신을 찾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 어머니 어디 계세요.’
    명복은 울먹였다.
    "대례복을 가져왔사옵니다. 혹여 옥체에 맞지 않으실까 하여 대령하였사옵니다."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나인이 조심스레 대례복을 상궁에게 건넸다.
    상궁이 대례복을 펼쳤다.
    구장복과 면류관이었다.
    하늘의 신성함을 상징한 산과 빛나는 덕을 상징한 불꽃…….
    아홉 가지가 장식된 구장복은 왕의 신성함을 드높였다.
    구장복은 짙은 푸른색으로 새벽 안개 같았다.


    1863년 12월 13일(음력)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진 명복은 빈전(殯殿)에서 어보를 받았다.
    철종의 시신을 모신 빈전은 냉기가 흘렀다.
    능이 갖춰지기까지 수개월이 걸리므로 시신이 상하지 않게 밑에 얼음을 채워 설빙(設氷)을 했기 때문이다.
    이어 즉위례는 창덕궁 인정문에서 거행됐다.
    면류관의 9줄 옥구슬은 움직일 때마다 일렁이며 명복의 시야를 가렸다.

    즉위례에는 문무백관이 참석했고 단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주목받았다.
    안동 김씨의 주력인 영의정 김좌근도 슬쩍 대원군을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난을 그려 병풍으로 바치던 이하응이 아닌가.
    흥선대원군은 김좌근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순간 김좌근의 등짝에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상중이라 음악은 삼간채 즉위례를 끝냈다.
    고종이 조선의 새 임금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12월 11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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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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