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미국 마이크론에 이어 반도체 업계 최고층인 176단 4D 낸드플래시를 개발했다. 낸드플래시 1위 삼성전자가 아직 128단을 넘어서는 제품 개발을 공식화 하지 않은 가운데 낸드 시장 점유율 4·5위의 도전이 매섭다.

낸드플래시는 전원이 꺼져도 정보가 저장되는 메모리 반도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낸드 제품의 단수 경쟁이 기술력의 척도로 평가되기도 한다.

삼성전자는 2019년 8월 세계 최초로 100단이 넘는 6세대 V낸드 SSD를 양산한 이후 줄곧 다음 세대 최초 타이틀을 경쟁사에 내줬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초격차 전략은 변함없이 위력을 발휘한다. 경쟁사가 개발한 적층 ‘단수(段數)’의 낸드 시장이 개화할 쯤이면 삼성전자가 보란듯 수율과 성능에서 우위인 제품을 양산해 고객사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개발한 176단 4D 낸드 기반 512Gb TLC /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가 개발한 176단 4D 낸드 기반 512Gb TLC / SK하이닉스
최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삼성전자의 3분기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33.1%다. 2분기(31.4%) 대비 1.6%포인트 상승하며 초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기간 3위인 웨스턴디지털이 15.5%에서 14.3%로, 4위 SK하이닉스가 11.7%에서 11.3%로, 5위 마이크론이 11.5%에서 10.5%로 점유율이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삼성전자의 위력이 돋보인다. 2위 키옥시아는 점유율이 17.2%에서 21.4%로 올랐지만, 이는 대만 반도체 회사인 라이트온의 SSD 사업부를 인수한 덕이다.

마이크론은 11월에 176단 낸드를 세계 최초로 양산해 고객사에 공급 중이다. SK하이닉스도 2018년 10월 96단 4D 낸드, 2019년 6월 128단 세계 최초 개발에 이어 최근 176단 512Gb(기가비트) TLC 4D 낸드 개발에 성공하며 괄목할 만한 기술력을 선보이고 있다.

시장 우려와 달리 삼성전자는 그리 조급하지 않은 눈치다.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의 176단 낸드가 88단 제품 두개를 이어 붙인 ‘더블 스택’ 방식으로 쌓은 제품이어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업계에서 유일하게 100단 낸드 이상을 ‘싱글 스택’으로 쌓고 있다. 더블 스택으로 개발하면 경쟁사 대비 손쉽게 200단 이상 낸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했다. 삼성전자의 낸드 초격차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삼성전자 6세대 V낸드가 탑재된 SSD / 삼성전자
삼성전자 6세대 V낸드가 탑재된 SSD / 삼성전자
싱글 스택은 적층 사이의 전기적 연결을 위한 채널 홀(구멍)을 한 번에 뚫는 공법을 뜻한다. 대부분 기업이 최신 낸드에 두번 나눠 채널 홀을 뚫는 더블 스택 공법을 사용하는데, 더블 스택은 같은 공정을 두번 반복하는 탓에 수율이 떨어지고, 생산비용이 싱글 스택 보다 최대 30%까지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전자는 기존 128단을 넘어서는 7세대 V낸드를 개발 중이다. 양산 시점은 2021년으로 예정돼 있는데, 7세대 낸드의 단수는 경쟁사와 같은 176단일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는 11월 30일 열린 ‘삼성전자 투자자 포럼 2020’에서 경쟁사 대비 15% 낮은 높이로 128단 3D 낸드를 양산하는 기술을 보유했으며, 더블 스택 기술을 적용하면 256단 이상의 낸드를 생산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진만 메모리사업부 마케팅팀 전무는 포럼을 통해 "실제 적층 단수는 소비자 수요와 시장 상황 등을 고려해 내부 전략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라며 "얼마나 쌓을 수 있냐 보다 현시점에서 시장에 최적화된 단수가 무엇이냐의 문제다"라고 설명했다.

한 전무가 얘기한 대로 낸드 시장은 높은 적층 단수의 개발이 이뤄지더라도 수요가 전환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SK하이닉스에 따르면 2020년 낸드 시장 매출 비중은 96단이 절반 이상, 128단이 30% 수준이다. 176단 시장이 열리려면 기존 96단 및 128단 낸드 생산 장비를 교체할 시간이 필요하다. 176단 낸드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드는 시기가 빨라도 2022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낸드 양산시 설계 최적화(칩면적)와 수율이 이익률과 직결되는데, 삼성전자가 그동안 낸드에서 초격차를 유지한 것은 이 두 가지를 경쟁사 대비 압도적으로 뽑아내서다"라며 "마이크론이 세계 최초라며 기술을 과시했지만, 176단 낸드 양산량이 늘어날 수록 수율과 성능에서 압도하는 삼성전자의 벽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