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2.11 23:00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김 상궁 있느냐!"
    "예에- 김상궁 아뢰오!"
    "매우 마렵다!"
    "예에-! 대령하겠사옵니다!"

    김상궁의 지시로 나인이 서둘러 매우(梅雨)틀(왕의 변기)을 들여왔다.
    한 자 정도 높이의 매우틀에 앉은 왕이 용무를 마치자 나인이 매추(잘게 썬 여물)를 뿌린 뒤 가지고 나갔다.
    왕은 물러가는 나인을 무심히 쳐다보다 퍼뜩 기억이 떠올랐다.
    ‘저 아이는 그날 운현궁에 김상궁과 함께 왔던 나인이 아닌가?’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댕기를 맨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다음날 밤 왕은 매우틀을 대령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전날 침전에 들어왔던 나인이 아니었다.
    "너는 누구냐?"
    짜증이 난 왕이 나인에게 힐난하듯 물었다.
    "예에- 변애련이라 아뢰오!"
    "어제 매우틀을 들고 왔던 나인은 누구더냐?"
    "소인은 아옵지 못하옵니다!"
    나인은 왕이 화를 내자 쩔쩔매며 몸 둘 바를 몰랐다.
    눈치 빠른 김상궁이 조용히 다가왔다.
    "마마 소인에게 말씀하시옵소서."
    "어제 들어왔던 나인이 누구냐고!"
    "이순아라 하옵니다."
    "흠흠- 내일부터는 그 아이에게 매우틀을 들라 하라!"


    김상궁으로부터 명을 받은 지밀 소속의 이순아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왕이 지밀나인을 불렀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또래는 물론 선배 상궁들도 이순아를 흘깃흘깃 쳐다 보았다.
    그 날 이순아는 하사받은 팥비누로 몸의 곳곳을 닦고 머리카락도 정성 들여 감았다.

    지루하게 기다리던 밤이 드디어 왔다.
    이순아는 바짝 조여 맨 저고리가 답답했다.
    왕도 밤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왕의 침소에 어둠이 내려앉자 이순아가 들어섰다.
    전보다 더 예뻐진 이순아를 보자 왕의 얼굴이 빨개졌다.
    김상궁이 곁눈질로 왕의 용안을 재빨리 살폈다.
    "너는 누구냐!"
    왕은 짐짓 모른 척 큰 소리로 물었다.
    "예에- 이순아라 아뢰오!"
    이순아의 얼굴이 복숭아색으로 물들었다.
    이순아의 목소리도 윤이 나는 게 옥구슬이 구르는 듯 했다.
    몸매가 훤칠하고 특히 피부가 갓 씻어놓은 배추처럼 희고 미끈했다.
    왕은 하마터면 손을 뻗어 얼굴을 만져볼 뻔했다.
    입술은 자두처럼 붉어 빨아보고 싶었다.
    꽤 풍만한 가슴과 균형 잡힌 몸매가 한떨기 매괴(장미)를 떠올렸다.

    ‘마마가 물러가라고 하실 때까지 머물러 있거라.’
    이순아는 조용히 침을 삼키며 김상궁의 지시를 떠올렸다.
    바짝 긴장해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이순아라 하였느냐?"
    왕은 짐짓 힘을 주는 바람에 변성기를 맞은 목소리가 쭉 갈라졌다.
    왕은 갈라진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예에-."
    이순아는 단아한 청년으로 변모하는 지존의 모습에 혼이 나갈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왕은 단조롭던 궁궐 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희(李㷩·고종)는 모든 게 어리둥절하고 정신이 없었다.
    대왕대비와 왕대비 웃전에게 아침저녁으로 인사 올리고 궁중 법도를 익혀야 했다.
    근엄한 얼굴을 한 신하에게 하루종일 글을 배우고 외워야 했다.
    외우기를 잘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지위가 크게 높아진 건 자랑스러웠다.
    아버지를 깔보던 자들이 이제는 ‘대원위 대감’이라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무시하던 자들을 패주고 싶었는데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는 왕궁의 최고 어른이었고 국정을 맡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지엄하기만 했다.
    모든 자들이 자신에게 절을 올리며 "망극하옵니다!"를 외쳤지만 언제부터인가 공허하게 들렸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공허하게 맴돌았다.
    왕은 찬수만 10가지가 넘는 수랏상에 눈이 휘둥그레해지고 상궁이 생선 가시까지 발라주자 감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시큰둥해졌다.

    침전인 동온돌에서 잘 때도 주변 곁방에서 직숙하는 상궁들에 둘러싸여 자야 했다.
    유모가 봉보부인이 되어 함께 입궁했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유모가 몸을 씻겨줄 때나마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커다란 함지박의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며 바짝 조여진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왕은 이순아의 희고 깨끗한 얼굴과 풍만한 몸을 떠올리면 뜨거운 피가 돌았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두둥실 뜨는 기분이었다.
    큰아버지에게 살풋 들었던 사내의 성정이란 이런 것일까.
    소년 왕은 억제하기 힘든 호기심과 열기에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왕궁의 상궁과 나인들은 행동거지가 산뜻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미인이 많았고 상냥한 표정에 품위가 있었다.
    지밀상궁인 김상궁도 쉰 살이 넘었지만 우아했다.

    왕은 생것방(生果房, 과일과 후식 담당)에서 식혜와 떡을 내오라 명한 뒤 수시로 이순아와 이야기를 즐겼다.
    지밀나인은 5세 이전부터 궁에 들어와 <소학> <내훈> 등을 읽어 교양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세답방은 물론 침방과 숫방(繡房)보다 지위가 높고 외모도 수려하며 총명했다.
    왕은 이순아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숨막히는 생활을 잊을 수 있었다.


    "오늘 밤 침전에 들도록 해라."
    "네 마마님?"
    비번이라 처소에서 쉬고 있는 이순아에게 김상궁이 찾아왔다.
    몸이 떨리고 정신이 없었다.
    이순아는 급히 몸을 씻은 뒤 분화장을 하고 몰래 감춰뒀던 장미유를 귀밑에 발랐다.
    유방을 살살 문질렀다.
    붉은 기가 돌면서 탐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진즉에 비단신을 빨아놓길 잘혔네."
    저고리를 입을 때 처소 일을 거드는 비자(婢子)가 히힛거리며 들어왔다.
    "아 참 한가위 때 하사받은 버선을 신으슈! 하사받은 버선을 신으면 운이 좋다니까."
    비자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쉿!"
    이순아는 비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웬 방정이야! 목이 달아나려고!"
    주위 눈들이 독사처럼 이순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왕은 아직 어느 궁녀에게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온돌로 향하는 길이 오늘따라 좁고 길게만 느껴졌다.
    지밀상궁과 나인들이 귀를 바짝 대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순아는 긴장한 바람에 치마를 밟고 비틀거렸다.
    "정신 바짝 차리거라!"
    김상궁이 침착하게 일렀다.
    이순아가 침전의 동온돌에 도착했다.
    장지문이 스르르 열리자 비단 보료 위에 앉은 왕이 궁녀 이씨, 이순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12월 18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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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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