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2.18 23:00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장지문이 열리는 동안 궁녀 이순아는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리가 하도 떨려 몸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김 상궁이 재빠르게 이순아의 팔을 붙들어 주었다.
    이순아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김 상궁의 손이 따뜻했다.
    각 처소, 각 방의 나인들은 물론이고 상궁들도 저마다 뒤돌아서서 한숨짓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왕이 이순아를 불렀다는 소식에 궁녀들은 난리가 났다.
    500명이 넘는 궁녀들이 주상 한 사람을 지아비로 보고 사는 세상이었다.
    그 중 승은(承恩)을 입는 궁녀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나인들은 이순아의 흉을 보며 시기와 선망에 가슴을 치고 있었다.
    비번인 상궁들은 처소에 들어가 장죽을 빨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댓살 아기 때부터 궁에 들어와 15년 정도가 지나야 정식 나인이 되었다.
    다시 15년 정도가 지나야 상궁이 되었다.
    길고 긴 여정이었지만 왕의 승은을 입으면 그날로 특별 상궁이 되었다.
    모든 잡무에서 벗어나 왕을 모시기만 하면 되었다.

    김 상궁은 이순아가 궁에 들어오자 딸처럼 머리를 빗겨주고 가르쳐주던 ‘스승 항아님’이었다.
    궁에서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용어를 쓰는지, 엄한 궁중 법도를 배웠다.
    김 상궁에게 언문과 <소학> 읽는 것도 배웠다.
    지밀 소속인 김 상궁은 다른 방의 상궁들에 비해 품격이 높고 인물도 좋았다.
    이순아에게 김 상궁은 어머니이자 스승이었다.
    꽃다운 나이에 왕의 손길 한번 받아보지 못한 김 상궁에게도 오늘은 이순아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김 상궁의 쓸쓸한 세월이 이순아의 가슴을 후벼 파는듯했다.
    김 상궁은 곁방으로 물러나 새우잠을 자며 직숙을 할 것이었다.


    장지문이 스르르 닫혔다.
    왕의 침소에는 세간을 갖다 놓지 않았다.
    안전을 위한 이유였다.
    한 구석에 놓인 향로에서 은은한 향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흠흠 이름이 무엇이냐?"
    왕이 먼저 어색함을 깨뜨렸다.
    이순아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괜히 모르는척 하고 싶었다.
    "예에- 이순아라 아뢰오!"
    순간 지밀(至密)나인이 되어 평소처럼 대답이 튀어나왔다.
    "곱구나."
    열네 살 왕은 눈앞의 이순아를 보자 몹시 설레었다.
    자기도 모르게 이순아의 이쁘게 솟은 가슴만 쳐다보고 있어 황급히 눈을 돌렸다.
    "가까이 오라."
    이순아가 조심스럽게 무릎으로 기어갔다.
    왕은 손을 뻗어 곁마기(당의 같은 옷으로 옆트임이 없다)에 넣고 있던 이순아의 손을 잡았다.
    이순아의 손은 약간 거칠지만 희고 통통했다.
    이순아도, 왕의 손을 잡은채 파르르 떨었다.

    "내 너에게 줄 게 있다."
    왕은 보료를 들추더니 뭔가를 꺼내 쥐어 주었다.
    초록 비단에 나비를 정성스레 수 놓은 자그마한 향낭이었다.
    "황공하옵나이다 마마!"
    이순아가 등을 구부려 절을 올렸다.
    그 바람에 머리를 묶은 자줏빛 댕기와 풍만한 엉덩이 선이 드러났다.
    이순아가 몸을 구부리는 바람에 유방이 왕의 손에 닿았다.
    순간 왕도 이순아도 놀랐다.
    왕이 이순아를 일으킨 뒤 촛대의 불을 껐다.
    불을 꺼야 직숙하는 상궁과 나인들의 눈과 귀가 조금이라도 흩어질 것 같았다.
    방안으로 휘영청 달빛이 들어왔다.
    왕이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이순아의 고름을 풀었다.
    "속적삼이 매우 부드럽구나."
    "예에-마마."
    이순아의 목소리는 지밀나인이 아니라 농염한 여인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왕은 이순아의 다홍치마를 벗긴 뒤 숨을 들이켰다.
    속곳에 단 향낭에서 사향이 퍼져 나온 것이다.
    알 수 없는 괴력을 가진 향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을 강박해 버렸다.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을 불러왔다.

    자두처럼 붉은 입술은 쓴맛이 돌 정도로 달았다.
    박꽃 같은 유방을 두 손에 쥐자 정신이 없었다.
    ‘악!’
    하늘이 찢기는 통증이 이순아를 덮쳤다.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왜 그러느냐?"
    미간이 좁혀진 이순아를 보고 왕이 흠칫 놀랐다.
    변성기인 목소리는 근심스럽고 초조했다.
    이순아는 혹여 왕의 심기를 해칠까봐 방긋 웃었다.
    그제서야 왕도 마음이 놓여 이순아의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괜찮느냐?"
    "예에-황공하옵니다 마마."
    이순아의 눈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환희와 고통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헤매던 왕은 뭔가 알아차린 듯 탐닉했다.
    ‘아 이런 것인가!’
    왕은 처음 맛보는 희열에 울컥했다.
    왕이란 지존이 된 실감을 비로소 하게 됐다.

    이순아는 검푸른 바다였고 왕은 그 위를 오르내리는 청룡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충만한 바다에 온몸을 던져 휘저었다.
    그 끝이 어디라도 들어가 바닥을 보고자 했다.
    정신이 아득하고 쓰러질 듯 힘이 들었지만 황홀했다.
    "네 몸에서 향내가 나는구나."
    "마마 황공하옵니다!"
    이순아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고였다.


    왕은 여느 때처럼 대왕대비전에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기 위해 찾았다.
    고단함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발걸음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부스스한 왕의 얼굴을 보고 대왕대비가 빙긋이 웃었다.
    상궁으로부터 지난밤 궁인 이씨가 시침(侍寢)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주상 지난밤 잘 주무셨소?"
    대왕대비는 차를 권하며 은근히 물었다.
    "예 어마마마."
    어린 왕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마침 흥선대원군도 대왕대비전에 들었다.
    대궐의 모든 일을 꿰고 있는 흥선대원군 역시 지난밤 일을 듣고 있었다.
    왕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어린 왕의 콧잔등에 땀이 배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제 사내로 여물어가는 아들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용안이 썩 좋지 않으십니다. 옥체를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흥선대원군은 아들의 소식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기기만 할 수도 없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왕은 지난밤의 쾌감이 다시 떠올랐다.
    ‘저 아이도 가례를 올릴 나이가 되었구나. 흠 어떤 왕비가 좋을까?’
    어린 왕과 흥선대원군의 눈이 서로 맞부딪쳤다.

    (12월 25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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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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