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2.25 23:00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아기씨 마님께서 내일 낙산사로 불공드리러 간다고 차비하시래요."
    자영은 여종 초계의 소리에 깜짝 놀랐다.
    "불공드리러 낙산사까지 간다고? 어머님은 어디 계시니?"
    "운현궁에서 전갈이 와서 가셨어요."
    "가까운 곳도 아니고 낙산사까지 간다니 무슨 일일까?"
    자영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외가쪽 언니인 이씨가 한마디 했다.
    "어제 그러시더라. 너 좋은 곳으로 시집가게 불공드려야겠다고."
    자영은 그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에휴- 좋은 혼처가 나면 뭐하니! 조선에서 계집 팔자라는 게……."
    이씨는 타구에 침을 퉤 하고 뱉은 뒤 장죽을 끌어당겼다.
    이씨는 이마의 잔털을 가지런히 뽑아 마치 먹줄을 그은 듯 반듯했다.
    사각합처럼 각진 얼굴이었지만 시원한 이마며 작은 눈과 입이 다부졌다.
    그러나 시집살이 10년 만에 쫒겨나 친정으로 돌아온 ‘소박데기’였다.
    친정에서 뒷방 살이를 하다 답답하다며 자영의 집에 며칠 묵으러 왔다.

    "언니는 어떡하다 이렇게 됐어요?"
    자영이 조심스럽게 이씨의 사정을 물었다.
    양반가 규수였던 이씨도 열다섯 나이에 시집을 갔기에 혼기를 맞은 자영에게 예사롭지 않았다.
    "썩어 문드러진 내 속을 말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라지."
    이씨는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를 쓰윽 문지르더니 재떨이에 장죽을 털었다.
    아직 스물다섯밖에 안된 꽃다운 나이였다.
    "시집살이 맵다 맵다 말로만 들었지 그렇게 고약한 줄 누가 알았겠니. 새벽닭 울면 일어나 물길어다 솥에다 밥 짓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눈치 살피며 진지 올리랴. 낮에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해놓으라는 옷 바느질로 날이 새고 다시 저녁 지어 올리고. 이불 깔아 드리고 나면 한밤중이야.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책보길 좋아했는데 시집가서는 한 번 펼쳐보지도 못했어."
    이씨는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다 자영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디 손 좀 보자. 그렇지 아직은 이렇게 곱지. 나도 너만큼 손이 고왔더랬어. 지금은 꺼실거려서 곰같이 됐지만. 흥 그런데 그 썩을 서방놈이……."
    이씨는 눈을 부릅떴다.
    "형부가 왜요?"
    자영은 치를 떠는 이씨의 어깨를 가만히 잡으며 물었다.
    "밤마다 지 마누라는 힘들어서 끙끙거려도 모른척하더니. 하루는 떡하니 첩을 끼고 들어왔지 뭐야!"
    "뭐? 형부가요?"
    "처음엔 기방을 들락거리더니 나중엔 버젓이 첩을 끼고 집으로 데려온 거야! 죽일 놈!"
    이씨는 수건에 팽하니 코를 풀었다.
    "너니까 이렇게 다 까발린다만. 내 속이 오죽했겠니. 시부모 하는 말이 뭔 줄 아니? ‘니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 품어라. 그게 부덕이다’라는 거야. 처음엔 이를 악물고 참았지. 소박맞은 계집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니까. 난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하는데 그놈은 첩 년하고 하루종일 노닥거리고. 하루는 서방놈이 와서 손에 낀 금가락지를 빼라는 거야."
    "금가락지는 왜요?"
    "그 첩 년이 내 걸 탐난다고 하니까 단박에 와서 빼라는 거였어!"
    이씨는 두 남녀가 눈앞에 있는 듯 이를 갈았다.
    "눈깔이 홱 뒤집어졌지. 내 칼을 받으라며 식칼을 들고 달려갔지! 근데 죽일 놈이 날 들어 내동댕이치는 게 아니겠어? 그 년은 달아나고."
    씩씩거리던 이씨가 자영에게 내뱉었다.
    "그날로 소박맞고 쫒겨났단다. 투기하는 여편네라고 시부모까지 노발대발한 거야. 조선에서 계집으로 태어난 게 죄지!"


    자영은 어머니 이씨와 함께 낙산사로 떠났다.
    말군(승마용 여자 바지)을 입은 자영과 이씨는 조랑말을 오래 타서인지 지쳐있었다.
    바닷가 정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기운차던 해가 물러가고 있었다.
    자영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동해는 처음이라 신기하고 그 광활한 풍경에 가슴이 벅찼다.
    진갈색의 바위를 덮치는 파도 소리가 귀를 울리고 천지를 울렸다.
    거대한 물결은 모든 걸 집어삼킬 듯 광폭하게 밀려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맑고 청정하게 고고함을 간직하려 해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거친 파도 때문에 불가능했다.

    우레같은 파도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바다가 검푸르게 변하면서 기암의 형상도 꿈틀대는 용으로 변하고 있었다.
    자영의 마음도 종잡을 수 없는 파도와 같았다.
    ‘나는 어떻게 될까?’
    좋은 혼처를 구하지 못하면 차라리 혼자 살까.
    ‘못난 사내를 만나 갑갑하게 사느니…….’
    양반가의 규수로 곱게 자란 이씨의 비극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여자는 과거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낙담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차라리 남장을 하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볼까?’
    차라리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싶었다.
    ‘아니야 내가 세상을 바꿔놓을 거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규수인 자영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너울이 훌렁 벗겨졌다.


    하늘에서 보랏빛 기운이 내려앉더니 감미로운 향기가 주위를 감싸 돌았다.
    옥피리 소리가 들리고 좋은 기운이 뱅뱅 돌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분홍 꽃잎이 날렸다.
    문득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귀부인이 자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시옵니까?’
    ‘아가 나는 인현왕후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귀부인의 모습은 대수머리에 적의(왕비 대례복)를 입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인자한 인현왕후의 모습이었다.
    침착하면서도 맑은 얼굴을 한 인현왕후가 자영을 바라보았다.
    ‘왕후마마!’
    자영은 큰절을 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고개를 들고 나를 보거라.’
    광채를 발하는 얼굴은 위엄이 있고 고상했다.
    자영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인현왕후의 용안(龍顏)이 너무나 낯이 익었다.
    ‘예 왕후마마!’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예 왕후마마? 감히 여쭈옵니다. 뭐라 하시었사옵니까?’
    ‘너에게 커다란 복을 줄테니 영원히 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거라!’
    ‘예 제가요 왕후마마?’
    자영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순간 인현왕후의 자취는 사라졌다.
    어느새 옥피리 소리와 향기도 사라졌다.

    잠에서 깬 자영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꿈이었다.
    "자영아 왜 그러니?"
    옆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 이씨도 덩달아 깼다.
    "예 기이한 꿈을 꿨어요."
    새벽 예불 소리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어머니 이씨가 땀에 젖은 자영의 이마를 쓸어넘겨 주었다.
    "아가 한양으로 돌아가는대로 운현궁으로 가자."
    "예? 운현궁은 왜요?"
    순간 자영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머니 이씨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얘야 내 미리 말은 안 했지만 대원위 대감께서 널 한번 보자고 하시는구나."
    "저를요? 대원위 대감께서 왜요?"
    "나도 모르지. 만나 뵈면 알게 되겠지!"
    자영의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2021년 1월 1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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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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