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1.01 23:00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한산 이씨는 자영을 데리고 대원위 대감의 운현궁으로 갔다.
    이씨는 자영의 외모를 신경 써서 다듬었다.
    숱이 많고 검은 머리카락을 곱게 땋은 뒤, 복(福)자를 금박한 제비부리 댕기를 드리웠다.
    댕기 윗부분에는 옥판을 달아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보이게 했다.
    송화색 저고리에는 향갑 노리개를 단정하게 달았다.
    길이가 짧고 품이 꼭 끼는 저고리에 풍성한 다홍치마를 입으니 호리호리한 몸매가 돋보였다. 노론 집안답게 저고리는 날렵한 당코깃을 달았다.
    금수를 두르고 비단으로 곱게 지은 운혜가 맵시를 완성했다.

    이하응, 대원위 대감의 위세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난날 마른 낙엽이 뒹굴던 낡은 운현궁이 아니었다.
    대왕대비의 명에 따라 운현궁은 크게 개축되어 4개의 문이 세워지고 주위를 지키는 장졸들의 무리로 사뭇 삼엄했다.
    사랑채에는 대원위와 자영의 양오라버니인 민승호가 함께 앉아있었다.
    민승호는 자영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입적한 뒤 관직에 올라 있었다.
    자영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뒤 자신을 아버지처럼 의지해왔다.
    민승호는 대원위 대감이 자영을 불렀다는 말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손위 누이이자 대원위의 아내인 부대부인이 자영을 왕비 후보로 천거했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따지고 보면 자영은 대원위의 처제인 셈이었다.

    학창의(흰색 포에 깃과 소맷부리, 고름 등을 검은색 천으로 두른 옷)를 입은 대원위는 송곳같은 얼굴로 자영을 맞았다.
    자영이 숙녀로 성장한 이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우선 자영의 빼어난 자태는 점수를 후하게 줄 만했다.
    "서책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무슨 책을 좋아하느냐?"
    자영은 머릿속에 <춘추(春秋)>가 설핏 지나갔다.
    "<여자 소학>입니다."
    자영의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렸다.
    입으로 튀어나온 답은 <여자 소학>이었다.
    "어느 구절이 떠오르느냐?"
    대원위는 자영의 눈빛을 놓치지 않으며 거푸 물었다.

    "내측에 가로대. 며늘이가 싀어버이를 섬기대 부모 섬김과 갓치하야 닭이 처음 울거든 다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머리빗고 머리털 감촛고 비녀 곳고 머리털 좆즈며 옷 닙고……."

    자영은 서책을 두세 번 읽으면 아예 외워버렸다.
    "하하하. 자영이가 저리 총명합니다 대원위 대감!"
    손에 땀이 배던 민승호가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흐음. 기억력이 비상하구나."
    "부끄럽습니다 대원위 대감."
    자영은 다소곳하게 말했다.
    대원위는 쌍꺼풀이 깊게 패인 눈을 가늘게 뜨고 자영을 직시했다.
    대원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자영의 까만 흑요석 같은 눈이 이를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대원위는 여흥 민씨 여자들에게 편안함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가 여흥 민씨였고, 어려서 외가에서 자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내 역시 여흥 민씨였는데 호색한인 자신에게 한 번도 투기를 부리지 않았다.
    여흥 민씨 집안은 좌우상을 비롯해 예조판서와 이조참판, 대사성 등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민치록은 그리 높지 못한 벼슬이었지만, 민치록의 부친 기현은 이조참판을 지냈다.
    대원위는 자영의 명민함이 약간 거슬렸지만 아비를 일찍 잃었으니 안동 김씨 같이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1866년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는 전국에 성적(成赤)을 하지 말라고 하교했다.
    성적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 곤지를 찍는 것을 말한다.
    혼례를 위한 치장을 금한다는 금혼령이었다.
    전국의 12세부터 17세에 이르는 사족 처자들의 혼례는 금지되고 사대부들은 딸의 처녀 단자를 올려야 했다.
    처녀 단자에는 성과 생년월일시, 본관, 부친과 조부와 증조부 외조부의 품계와 관직을 적었다. 왕비 간택에는 가문과 부덕, 용모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간택에 뽑힐 경우 예복과 가마를 준비해야 하는 비용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집도 적지 않았다.

    왕비의 초간택은 2월 25일 12시에 이루어졌다.
    자영은 예법에 따라 다홍치마에 분홍 속저고리 위에 송화색 저고리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예복인 초록색 견마기(옆이 트이지 않은 당의 같은 옷)를 입었다.
    머리는 낭자 머리에 도투락 댕기를 매었다.
    금박을 입힌 길고 화려한 도투락 댕기를 늘어뜨리자 찬란한 보석 같았다.
    초간택에서 첨정 민치록의 딸 자영과 유학(幼學) 김우근의 딸, 현감 조면호의 딸, 영(令) 서상조의 딸, 용강 현령 유초환의 딸 5명이 뽑혔다.
    자영이 초간택에 뽑히자 감고당과 민승호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재간택은 나흘 뒤인 29일 오전 9시에 이루어졌다.
    전례를 따르면 보통 3명 정도가 뽑혔지만 이번에는 민자영, 한 명만 뽑혔다.


    삼간택에서는 초간택과 달리 성적을 허용했다.
    삼간택에 나올 자영에게 대왕대비 조씨는 미리 옷을 하사했다.
    자영은 소례복인 초록색 당의를 입고 노리개 석 줄을 달고 족두리를 올렸다.
    비단 당의를 입은 자영은 우아하면서도 금강석처럼 빛났다.
    자영의 자태에서 난향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에고 내 딸아!"
    이씨는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깊은 근심에 몸둘 바를 몰라 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머니 근심 마세요. 무얼 그리 걱정하세요."
    자영이 어머니의 손을 잡아주었다.

    삼간택은 3월 6일 오전 9시 창덕궁 중희당에 이루어졌다.
    대왕대비는 삼간택 자리에 정원용 등 시원임 원로 대신들과 여러 종신(宗臣)들을 불렀다.
    "삼간택에 올라온 민치록의 딸에 대해 의견들이 있으시오?"
    대왕대비가 대신과 종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고종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며느리를 간택하는 자리였다.
    대신들과 종신들은 이미 대왕대비와 대원위 간에 이야기가 다 된 걸로 눈치채고 있었다.
    누구도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다.
    "아름답고 극진하니 나라의 복이다!"
    대왕대비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영의 손을 어루만지며 크게 기뻐했다.
    "나라의 대혼(大婚)이 결정되었으니 경하드리옵니다!"
    "대왕대비 마마 경하드리옵니다!"
    "나라의 경사이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자영은 귀가 웅웅 울렸다.
    얼굴과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내가 진정 왕비로 간택된 거야?’
    궁궐에서 기구한 운명을 맞은 인현왕후(숙종의 왕비)와 지아비를 왕위에 올리고도 집안이 몰살당한 원경왕후(태종의 왕비)가 떠올랐다.
    자영은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분들과 달라! 조선 최고의 왕비가 될 것이야!’

    삼간택을 마친 자영은 세수를 한 뒤 가래머리로 고쳤다.
    그리고 수(壽)와 복(福)을 금박으로 입힌 초록색 원삼으로 갈아입었다.
    여섯 명이 매는 가마를 타고 50명의 호위를 받으며 별궁인 운현궁으로 향했다.
    전례에 따르면 어의궁(於義宮)으로 가야 하지만 이번엔 운현궁으로 모시라는 명이 내려졌다.
    열여섯 민자영은 이제 별궁에서 궁중 법도를 익히는 왕비 수업을 받아야 했다.

    (2021년 1월 8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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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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