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1.08 23:00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김좌근은 대원위가 청수동 별장으로 오겠다고 기별을 보내자 나합과 함께 벌벌 떨고 있었다.
    나합은 나주 출신 기생으로, 김좌근의 애첩이었다.
    나주합부인이라는 의미로 ‘나합(羅閤)’이라 했다.
    안동 김씨의 거두인 김좌근의 총애를 업고, 지방 수령 자리를 주무르자 얻게 된 별칭이었다.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를 이끈 순원왕후 김씨가 김좌근의 누이였다.
    김좌근은 영의정에 세 번 오를 정도로 근(根)자 돌림 중에서도 막강한 권세를 누려왔다.

    김좌근은 며칠 새 볼이 옴폭 패이고 눈 주위가 거무스레해졌다.
    얼마 전 대왕대비가 나합을 고향으로 쫒아내라는 엄명을 내려, 나합과 울고 있던 중이었다.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렸다는 이유로 나합이 김좌근의 뺨을 갈긴 것이 발단이 됐다.
    대왕대비는 "천첩이 감히 재상 행세를 하면서 뇌물을 받아 치부하고 대신의 얼굴에 손찌검까지 했으니 당장 쫒아내라"고 명했다.
    합(閤)이라는 것은 정승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호칭인데 천한 기생이 이를 사용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대원위 대감 어찌 여기까지 납시었습니까."
    김좌근은 떨리는 몸을 이기며 대원위에게 몸을 굽혔다.
    "대왕대비 마마가 진노하셔서 큰일이오. 닷새 안에 나주로 가야 한다고 날짜까지 못박으셨다지요."
    김좌근은 대왕대비란 말에 꺼질 듯 신음소리를 냈다.
    "이러실 게 아니라 쪼까 목이나 축이고 시작하시랑게요 호호."
    나합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준비해둔 술상을 들여왔다.
    매끈한 백자주병에 담긴 이화주를 따랐다.
    술잔으로 이화주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합은 갑자기 대원위에게 큰 절을 올렸다.
    나합은 유방의 곡선이 드러날 정도로 저고리를 짧게 지어 입고 띠로 가슴을 동여맸다.
    짧은 저고리와 치마 사이를 동여맨 야릇한 선이 남자를 자극했다.
    붉은 스란치마도 강렬했다.
    나합은 김좌근의 집을 드나드는 문객들과도 수상한 소문을 뿌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큰절을 하느냐?"
    대원위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경사랑게요! 대원위 대감! 간택도 했겠다 이자 곧 며느님 보실테니 경사랑게요!"
    나합은 대원위의 눈이 자신의 유방에서 떠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경하드리옵니다 대원위-대감!"
    김좌근도 머리를 조아렸다.
    "고맙소. 헌데 그건 그렇고 대왕대비 마마의 진노를 어찌 풀어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대감과의 옛정도 있어서 나 몰라라 하기도 그렇고 참."
    "지가 죽을 죄를 지었응게 지발 말씀 좀 잘 드려 주시랑게요."
    나합이 병풍 뒤에서 뭔가를 끙끙거리며 가지고 나왔다.
    보자기를 풀자 묵직한 돈궤가 나왔다.
    "10만냥이랑게요."
    나합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궐 경사에 필요할 테니 쓰시라고 준비했어라."
    대원위는 김좌근을 쳐다보았다.
    "경복궁을 짓는데 진척이 더디고 있어 답답하오. 거금의 원납전이 들어와야할텐데 그것도 막막하고."
    대원위는 경복궁을 위해 원납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매 어찌카! 대감이 준비하란 걸 깜빡 했당게요."
    나합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병풍 뒤로 가 궤를 하나 더 밀고 나왔다.
    "우리 나으리 모시고 한양에서 살 수만 있게 해주시랑게요."
    나합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두 사람의 정이 깊은 지 오래인데 어찌 생이별을 하겠나."


    1866년 3월 9일 오전 8시 왕이 혼례를 요청하는 의미로 신부 집에 살아있는 기러기를 보내는 납채례(納采禮)가 행해졌다.
    11일 낮 12시 혼인의 정표로 예물을 바치는 납징례(納徵禮)가 이뤄졌으며, 17일 낮 12시에는 신부에게 길일을 알리는 고기례(告期禮)가 치러졌다.
    20일 낮 12시에는 신부를 왕비로 책봉하는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를 전달하는 책비례(冊妃禮)가 이어졌다.

    21일 오전 8시 왕이 별궁인 운현궁으로 가 왕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례(親迎禮)가 펼쳐졌다.
    왕실의 성대한 가례에서 백미가 친영례였다.
    봉황의 화려한 깃털처럼 갖가지 색깔의 비단으로 차려입은 문무백관과 장졸들, 궁인들이 펼치는 일생일대의 장관이었다.
    "물렀거라 물렀거라!"
    구경나온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해 붉은 전립을 쓴 뇌자(牢子)들이 붉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주변을 정리했다.
    한성부 판윤과 좌윤·우윤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령을 앞세운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 등이 말을 타고 나타나면서 성대한 막이 올랐다.
    금빛 양관을 쓰고 금칠한 비녀까지 찌른 당상들은 비단으로 지은 붉은색 조복을 입고 엄숙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헌부 당상의 뒤를 이어 병조의 당상과 금부도사가 나타나고 대기수와 취기수를 앞세운 호위 부대가 나섰다.
    공작의 깃털로 장식한 전립을 쓴 훈련대장을 선두로 말을 탄 중군과 교련관들이 행렬을 이어갔다.
    거대한 창에 소의 꼬리털을 단 둑기(纛旗)와 교룡기가 펄럭이며 나타나 왕이 탄 어가가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교룡기는 용과 구름을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화염을 상징하는 붉은 천을 단 거대한 깃발이었다.
    주작기와 황룡기 같은 의장기가 쉴새 없이 행진하고 붉은 홍개와 푸른 청개가 지나갔다.
    금등자 은등자, 금장도 은장도 금월부 은월부 봉선(鳳扇) 용선(龍扇) 등 행사를 치장하는 의장물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흑단령에 말을 탄 관리와 내시가 뒤를 이었고 주변에는 활 통을 메고 칼을 찬 무관들이 위용을 뽐냈다.
    사이사이에 전진을 알리는 북과 멈춤을 알리는 징을 치는 자들이 끼어 거대한 행렬의 속도를 조절했다.
    한 무리의 행렬이 지나간 뒤 드디어 왕의 어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의 어가다!"
    "어디 어디!"
    "아얏! 내 발 밟았어!"
    누군가 소리치자 백성들은 까치발을 올리며 저마다 왕의 가마를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극히 화려하고 장중한 행렬을 본 백성들은 잠시 모든 시름을 잊고 조선 왕실의 지엄함에 감동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가 주변에는 별감과 총을 든 무예별감들이 삼엄한 경비에 나섰다.
    금군과 특별히 뽑은 가전별초,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호위 군관들이 어가를 호위했다.
    어가에 탄 왕조차 눈 앞에 펼쳐지는 친영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절을 올리는 문무백관과 백성들을 보자 가슴이 무거우면서 뭉클해졌다.

    왕비의 책봉에 쓰여진 교명과 옥책, 금보, 명복을 각각 담은 4개의 가마가 분위기를 바꾸었다.
    알록달록 채색한 4개의 가마는 아담하면서도 우아한 멋이 있었다.
    호위병력인 금군과 오위장, 선전관 등 무장한 장교와 군사들이 나타났다.
    마침내 18명의 가마꾼이 메는 왕비의 가마가 나타났다.
    가마꾼들은 다홍색 옷에 다홍색 두건을 써 꽃가마를 메고 떠가는 것처럼 보였다.
    왕비의 가마를 따르는 상궁과 의녀는 말을 타고 짙은 너울을 썼으며 궁중 나인들은 머리에 꽃을 꽂아 분위기를 돋우었다.
    "어쩜!"
    가마에 탄 왕비는 구름 위에 둥실 떠 있는 듯했다.
    가마 안에서 나무를 손톱으로 긁어보았다.
    원삼을 입은 내명부와 화려한 예복을 입고 경하해주는 신하들을 보니 꿈만 같았다.
    구름처럼 모여든 백성들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왕비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기원했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보배로운 이 나라와 종묘사직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나이다!’

    특이한 것은 왕비의 가마가 지난 뒤 가마꾼이 멘 교자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 모든 거사를 주도한 47세 대원위가 탄 가마였다.
    영조의 친영례 때 동원된 수는 1118명. 두 배에 가까운 2433명이 고종의 친영례에 투입됐다.
    무너진 왕권을 세우겠다는 대원위의 야심이 빚어낸 대축전이었다.

    (2021년 1월 15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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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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