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1.15 23:00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1866년 3월 21일 창덕궁 중희당.
    신랑과 신부인 왕과 왕비가 고기와 술을 함께 나누는 동뢰연이 열렸다.
    다홍색 적의(翟衣)를 입은 왕비는 눈부셨다.
    진주 같은 피부에 분을 곱게 바르고 입술을 붉게 해, 한껏 물을 머금은 모란처럼 고혹적이었다.
    적의는 붉은색 비단에 100마리가 넘는 꿩을 정교하게 수놓은 대례복이었다.
    금색과 붉은색 파란색 녹색으로 수놓은 꿩은 살아서 움직였다.
    왕비가 움직일 때마다 꿩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를 듯했다.
    끝단에는 금빛 봉황이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가슴과 어깨에 단 둥근 보(補)에는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용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금실로 세밀하게 수놓은 용은 눈이 살아 있고 구름 하나하나가 상서로움과 생동감을 드러내었다.
    왕비의 머리는 가체를 더한 대수(大首)였다.
    커다란 금빛 비녀가 가로지르고 옥으로 만든 떨잠이 우아함을 더했다.
    나비와 꽃을 옥과 비취 칠보 홍옥으로 꾸며, 가느다란 철사 위에서 좌우로 파르르 떨렸다.
    양쪽 머리 아래 끝에는 봉잠(鳳簪)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봉황의 눈에는 작은 진주를, 머리에는 홍파리, 다리 부분에는 청파리를 감입하여 그 자체가 신묘한 걸작이었다.
    다홍색 비단 적말과 비단 꽃신이 선계의 자태를 갈무리했다.

    얼굴이 크거나 목이 짧을 경우 대수에 눌리거나 적의가 부담스럽다.
    왕비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이 작고 갸름한데다 목이 길어 절묘한 균형과 우아함을 한껏 발휘했다.
    왕비를 옆에서 부축하는 부무(傳姆)부터 의례를 인도하는 상의(尙儀), 차비들까지 왕비의 자태에 놀라고 흥분했다.
    "아휴 저 뒷태 좀 보소! 중전마마가 선녀 아니신가!"
    "누가 아니래 저렇게 아리따운 중전마마는 처음 보네."
    "지금 막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야!"
    부복한 상궁들은 왕비의 모습을 곁눈질하느라 바빴다.
    가리마에 당의를 입은 차비들은 저들끼리 분주하게 속삭였다.

    짙은 색 구장복에 면류관을 쓴 왕도 3년 전 즉위 때와는 확 달랐다.
    키도 훌쩍 커지고 눈빛도 한결 깊어졌다.
    면류관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영롱한 구슬이 멋을 더하고 있었다.

    동뢰연이 치러지는 양쪽에는 매화를 꽂은 커다란 병과 향로가 놓였다.
    예복인 원삼을 입은 상식(尙食)이 왕과 왕비에게 예주인 합환주를 올렸다.
    합환주를 함께 마시며 부부로서 몸을 합하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더불어 할 것을 약조한 것이다.
    상침(尙寢)이 요와 이불을 깔았다.
    한쪽 벽에는 봉황 10마리가 구름 속을 날고 그 아래로 바위를 사이에 두고 오동나무와 대나무, 난초, 작약이 화사하게 그려져 있었다.
    병풍의 모란은 요염함을 겨루듯 요란하게 피어올랐다.

    상궁이 불을 끄고 나가자 드디어 왕과 왕비 두 사람만이 남았다.
    주변에서 엎드리며 대기하고 있던 젊은 나인들도 모두 물러났다.
    왕비는 며칠 동안 실수없이 가례를 치르느라 입속에 혓바늘이 돋았다.
    긴장을 풀지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조심스레 숨 쉴 때마다 비단 이불이 조용히 오르락 내리락 했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한쪽 구석에 피워놓은 향로에서 은은한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왕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적의를 입고 대수를 한 왕비는 지금까지 본 여인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국동 아주머니라고 부르던 사람이 아닌가.
    길고 긴 가례를 마치자 이순아의 생각이 간절해졌다.
    지금 순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고 있겠지.
    순아의 보드랍고 따뜻한 유방을 만지고 싶었다.

    왕비는 어둠에 익숙해지자 천장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옆에 누운 사람은 자신의 첫 사내이자 이 나라의 지존인 상감이었다.
    문틈으로 파고드는 바람소리만 들렸다.
    시간이 흘렀고 숨이 막혔다.
    "상감마마 주무시옵니까?"
    참다못한 왕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왕 역시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상감마마."
    "그동안 고단했을테니 그만 쉬시오. 나도 무척 고단하오."
    왕이 돌아누우며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얼마간 대왕대비 등 웃전의 눈치를 보느라 참았던 왕은 곧바로 궁인 이씨를 찾았다.
    대신들과의 지루한 진강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마마! 상감마마!"
    가례 기간 동안 마음을 졸였던 궁인 이씨는 연인을 보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궁인 이씨는 상궁이 문을 닫자마자 무엄하게도 왕의 품에 뛰어들었다.
    "마마! 마마!"
    궁인 이씨는 눈물로 화장이 지워질까봐 초조했지만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왕의 눈에는 그 모습조차 애틋하게 좋았다.
    "어디 우리 애기 얼굴 좀 보자꾸나."
    왕은 궁인 이씨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입을 맞추었다.
    궁인 이씨의 눈물이 짭조름하게 입술로 타고 들었다.
    얼마나 안고 싶었던가.
    왕은 온몸으로 뻗쳐오는 열기를 내몰기라도 하듯 으스러져라 안았다.
    "아이 참 아프옵니다 마마!"
    궁인 이씨는 눈물을 거두며 교태 섞인 목소리를 냈다.
    봄날 춘정을 이기지 못하는 꾀꼬리의 목소리처럼 왕의 온몸을 처절하게 파고들었다.
    남성이 하늘을 뚫을 듯 왕성해진 왕은 궁인 이씨의 모든 걸 애무하고 탐닉했다.
    궁인 이씨는 왕비라는 엄청난 벽을 만난 이상 모든 걸 걸고 지켜야 했다.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야성을 들춰내고, 부끄러워하던 마성을 끌어올렸다.
    왕이라는 남자를 굴복시켜야 했다.
    자신에게 더 깊이 파고들도록 자극하고 끝없이 만족시켰다.
    궁인 이씨의 몸은 왕의 몸을 틀어쥐고 호령했다.

    "하하하 그만 그만! 뭐든 들어 줄테니 그만 하거라 하하하!"
    왕은 환희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쳤다.
    몇 번이나 서로 솟구쳤는지 몰랐다.
    새벽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왕은 궁인 이씨의 매끈한 허리를 손가락으로 그리며 말했다.
    "무엄하다! 지엄한 상감을 꼼짝 못하게 하다니! 하하하!"
    "마마 참말로 뭐든 소첩의 원을 들어주실렵니까?"
    이마에 땀이 밴 궁인 이씨가 길고 짙은 눈썹을 반짝 치켜떴다.


    내전 앞뜰에 달이 휘영청 밝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유난히 크고 가깝게 다가왔다.
    왕비는 밤 단장을 고친 뒤 서안을 끌어당겼다.
    혹여 전하가 자신을 찾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밤 화장을 거른 적이 없었다.
    전하의 발길이 궁인 이씨에게 가고 있다는 말도 듣고 있었다.
    왕비는 긴 밤을 보내기 위해 좋아하는 서책을 읽기로 했다.
    그토록 접하고 싶던 규장각이 있는 궁궐로 들어왔으니 보람찬 일이었다.
    왕비는 우선 조선 왕조 실록을 꺼내오도록 명했다.
    숙종대왕의 실록을 택했다.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에게 축출되는 대목에 이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2021년 1월 22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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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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