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1.22 23:00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왕비 마마 그동안 무탈하시었습니까?"
    왕비는 모처럼 자신을 찾은 여흥 부대부인 민씨를 반갑게 맞았다.
    부대부인은 대원군의 아내이자 왕비가 되기 전 민자영의 양 언니였다.
    왕비는 시어머니가 된 부대부인을 보자 반가움과 설움이 함께 밀려왔다.
    부대부인은 적적한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민승호를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민승호는 왕비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못내 안쓰러웠다.
    "마마 옥체를 상하지 않게 잘 돌보십시오. 그래야 건강한 원자를 보실 게 아닙니까."
    민승호는 왕비가 외로운 밤이면 규장각 서책을 들고 지샌다고 들었다.
    "예 앞으로는 독서 시간을 줄일까 합니다."
    왕비는 억지로 미소를 짓자니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마마 기억나십니까.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대령하라고 얼마나 닦달하셨습니까 하하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진땀이 납니다."
    민승호는 왕비의 안색을 살피며 둘러댔다.
    "제가 좀 유별난 데가 있지요."
    딱딱하게 굳은 왕비의 얼굴이 잠시 풀어지는 듯했다.
    "여전히 호학하시니 기쁘게 해드리려고요. 여기 구하기 어려운 서책을 좀 구해왔습니다."
    "예? 구하기 어려운 책이요?"
    왕비는 달달한 식혜를 권하며 반색을 했다.

    언제나 왕비를 기쁘게 하는 것은 책이었다.
    민승호가 보자기를 펼치자 중국에서 온 서책들이 나왔다.
    "이것 좀 보십시오. 이런 그림은 처음이실 겁니다."
    책을 펼치니 바다 옆에 커다란 대로가 뻗어있고 바다에는 알 수 없는 거대한 물체가 떠 있었다.
    대로에는 말이 끄는 수레에 기이한 옷을 입은 양이(洋夷)가 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중국의 기서(奇書)입니까?"
    민승호가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역관이 가져온 것인데 이곳이 신강(申江· 상해)이라 합니다."
    "예? 신강이요?"
    "헌종대왕 시절 서양 오랑캐들이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오랑캐들이 신강에 드나들면서 이렇게 변했다고 합니다."
    "참말입니까? 이건 바다지요? 여기에 있는 건 무엇입니까?"
    왕비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 떴다.
    "예 맞습니다. 거선(巨船)입니다. 여기서 철포를 쏘기도 한답니다. 연경의 화사들이 베껴 그린 그림인데 한번 보시지요. 역관이 인삼을 주고 몇 책 가지고 왔답니다."
    부대부인이 근심스런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대원위 대감이 아시면 어쩌려고 이런 걸 들고 왔소."


    민승호가 들고 온 그림책은 왕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런 해괴한 기물이 세상에 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 이게 다 환술 아닌가?"
    왕비를 시위하던 지밀나인 중 눈치가 빠른 한 명이 나섰다.
    "마마, 대왕대비전 서사 상궁의 형부가 연행에 자주 가는 역관이라고 하옵니다. 그리 궁금하시면 한 번 알아볼까요?"
    서사 상궁 강씨는 왕비의 명을 받고 형부에게 연경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바를 글로 적어 올리라고 했다.
    조정은 역관들이 사행길에 오를 경우 인삼 80근을 주어 사고팔 수 있게 했다.
    이 때문에 역관들은 청나라 사정에 누구보다 민감하고 파악하려 애썼다.
    왕비는 상감에 대한 원망과 비애를 잊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관심거리에 정신을 쏟았다.
    상감이 찾지 않는 곤전(坤殿)이란 쓸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강씨가 올린 글을 보자 왕비는 믿을 수 없었다.
    헌종대왕 당시 중국에서 일어났다는 아편전쟁의 내막이었다.


    청에서 엄청난 양의 차를 수입하던 영국은 무역 적자에 비틀거렸다.
    영국 노동자들이 차를 즐기면서 수입은 급증했는데 자신들의 수출품인 모직물은 청국에서 별 인기가 없었다.
    차와 비단은 인기 품목이라 무역을 할수록 청국이 유리했다.
    청은 오랑캐인 영국과 공식 조공 관계를 맺지 않은 이상 영국인이 청의 관리와 직접 대면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영국의 총영사를 오랑캐 두목이라 생각해 이목(夷目)이라 불렀다.
    영국은 적자를 메꾸기 위해 고민하던 중 인도에서 아편을 생산해 청에 밀매하기 시작했다.
    아편은 급속히 퍼졌고 청나라 병사와 농민들까지 중독이 됐다.
    청 황족 중에서도 상습적으로 흡식하는 이가 나왔다.
    1838년 청의 도광제는 영국 아편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한 임칙서를 막강한 흠차대신에 임명했다.
    임칙서는 자신의 동생도 아편으로 목숨을 잃은 터라 강경했다.
    아편무역의 중심지인 광동으로 간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에게 아편을 내놓으라고 명했다.
    당시 아편 상인 중 큰 손은 자딘메디슨 상회의 자딘이었다.
    자딘메디슨은 후일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영국으로 유학할 때 은밀히 돕기도 했다.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이 명령을 무시하자 1천 명의 병사를 풀어 이들의 주거지를 포위해 물과 식량을 차단해버렸다.
    놀란 상인들이 아편 2만 상자, 모두 1500만 달러에 달하는 1400t의 아편을 내놓았다.
    임칙서는 해변가에 인공연못을 파고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아편은 소금과 석회에 약했다.
    아편을 바닷물에 담가 두었다가 다음 날 석회를 들이붓자 아편이 하얀 연기를 내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편에 그냥 불을 지를 경우 땅에 녹아내려 잔량을 거둬낼 수 있기 때문에 바다로 흘려보낸 것이다.

    밀무역으로 청의 은을 빨아들이던 영국 상인들은 녹아내리는 아편을 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가이아나에서 노예감독관으로 있다 중국에 무역감독관으로 부임한 찰스 엘리엇은 광분했다.
    엘리엇이 본국을 찔러 육군 4000명을 포함해 대포 74문을 실은 기함 웰즐리를 포함한 동양함대 원정군이 편성되었다.
    청 조정은 막강한 영국 함대가 북경의 코앞인 천진에 나타나자 혼비백산했다.
    결국 1842년 남경에 정박한 영국 군함 콘월리스 호에서 신강 개항 등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청조는 연경을 찾은 조선 사절단에게 가끔 있는 오랑캐의 반란이라며 일축했다.

    1856년 일어난 2차 아편전쟁은 더 심각했다.
    영국뿐 아니라 법국까지 가세해 북경을 공격하면서 황제가 열하까지 몸을 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860년 북경조약이 맺어졌다.
    조선에서는 1861년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정사 조휘림과 부사 박규수를 열하사(熱河使)로 급히 파견했다.


    왕비는 역관의 글을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상감과의 관계도 버거웠는데 나라 밖의 일은 머리와 가슴을 더욱 무겁게 했다.
    이때 왕비를 사정없이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상감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가 드디어 회임한 것이다.

    (2021년 1월 29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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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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