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1.29 23:00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1868년.
    궁인 이씨, 이순아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직접 동으로 만든 방울을 힘차게 울리며 득남의 기쁨을 천하에 알렸다.
    신하들의 경하를 받은 왕은 산모와 아기를 운현궁에서 돌보도록 전교하였다.

    왕비는 대왕대비전에 문안을 올리러 갔다가 이미 와 있는 왕, 그리고 대원군과 맞닥뜨렸다.
    왕은 왕비를 보자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얼마 만에 왕자가 탄생한 것인지 모르겠소 주상!"
    얼굴이 상기된 대왕대비는 왕을 금세라도 안아버릴 듯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대왕대비 마마의 지극히 높고 크신 사랑과 은덕 때문이옵니다."
    "대원위 대감도 얼마나 기쁘십니까! 산모의 조리도 운현궁에서 한다니 왕자를 매일 들여다보시겠소. 부럽소이다!"
    "예 대왕대비 마마, 실은 왕자를 자주 보고 싶어 운현궁으로 정한 것이옵니다."
    "네 그럴 줄 알았소이다 호호."
    대왕대비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송구하오나 아기가 저를 꼭 빼닮았다고들 합니다 하하하. 그러니 더 사랑스러워 들여다 보게 됩니다."
    "오 그래요! 저런 저런 호호호."
    대원군은 새로 태어난 왕자에 대해 신이 나 떠들면서도 왕비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왕비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왕실의 큰 경사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두커니 앉은 왕비는 갑자기 목젖이 말라 침을 삼킬 수가 없었다.
    뭔가 말을 하려 해도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누군가 머리 위에서 찬물을 끼얹는 것만 같았다.
    왕비는 초록 당의 속에 감춘 두 손을 쥐어뜯고 있었다.


    대왕대비전을 나온 왕비는 비교적 인적이 드문 정자를 찾다 애련정(愛蓮亭)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사방이 겹겹이 담으로 쌓이고 문으로 가려진 내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참 애련정은 숙종이 세운 정자가 아닌가!
    그러나 한 발짝도 옮길 기력이 없어 주저앉았다.
    봄의 절정을 맞은 계절이라 애련정 주변에는 꽃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넓고 흰 꽃잎의 백작약은 청초하면서도 고혹적이었다. 분홍을 수줍게 늘어뜨린 금낭화는 가늘게 매달려있고 보랏빛 수국은 화사하면서도 청신했다. 짙고 깊은 적색의 매괴가 농염한 빛을 뿌리는 가운데 모란의 고아한 자태가 왕비의 눈길을 잡았다. 왕녀의 스란치마같이 풍성하면서도 사람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었다.
    첫날밤 왕과 왕비의 침소에 둘러쳐졌던 모란 병풍이 떠올랐다.
    꽃들의 분방하면서도 달콤한 향기에 취할 것만 같았다.
    신록을 내뿜는 나무는 이 꽃 저 꽃을 다 품으려는 사내처럼 왕성했다.
    자영의 가냘픈 한숨만이 춘정과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왕의 침소인 동온돌은 계속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자영은 황량한 동온돌을 마주한 서온돌, 자신의 침소로 돌아왔다.
    ‘나한테 기회도 주지 않고?’
    자영은 동온돌을 바라보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대왕대비를 비롯해 3대의 웃전을 지극정성으로 잘 모신다며 궁에서 칭찬이 높은 자영이었다.
    ‘천출한테 빠져 감히 왕비인 나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날카로운 백동 촛대를 뽑아 쳐들어 가고 싶었다.
    자신을 간택한 사람은 대원군이 아닌가.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대원군이 더 치욕적이었다.


    "나 혼자 편히 씻고 싶으니 다들 물러가 있거라."
    목욕탕에 들어온 자영은 상궁과 나인을 물리쳤다.
    촤악-.
    자영은 몸에 물을 끼얹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내전에서는 사방에 상궁과 나인들이 귀를 쫑긋하며 대기하고 있어 맘껏 울 수도 없었다.
    촤악-.
    얇고 흰 비단을 걸친 몸이 젖어 들었다.
    자영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쳐다보았다.
    풍성하고 긴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얼굴은 갓 짠 우유처럼 파리했다.
    젖은 비단 아래로 탱탱한 유방이 드러났다.
    유연하고 긴 허리와 곧고 미끈한 다리가 보일 듯 말듯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순아의 유방을 애무하는 이희가 아른거렸다.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목욕탕 안에 이순아와 이희의 교성이 가득 울렸다.
    두 사람은 보란 듯 더욱 뒤엉켰다.
    자영이 이순아의 머리채를 끌고 수챗구멍에 처박으려 해도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순아는 색기 흐르는 눈으로 자영을 바라보며 간드러지게 웃어댔다.
    벌거벗은 두 사람 사이에 고추 달린 사내아이가 울고 있었다.
    사내아이를 어르면서도 두 사람은 교접의 절정에 타올랐다.
    "안돼!"
    욕조에 들어간 자영은 물속에 갇혀 허부적거렸다.
    물이 자영의 가슴을 짓눌렀다.
    마치 이순아와 이희가 눌러대는 것 같았다.
    자영은 물속에서 햇살처럼 퍼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숨을 멈췄다.
    적요만이 그득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희와 이순아가 발광하는 주위로 대례복을 입은 상궁들이 숨을 죽이며 엎드리고 있었다.
    나인들은 곁눈질로 자영을 애처롭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점점 자영의 숨이 얕아지고 있었다.

    ‘민자영!’
    누군가 자영을 불렀다.
    아버지인가?
    자신을 도와줄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고 없지 않은가.
    어머니인가?
    먼 곳의 어머니는 도와줄 힘조차 없었다.
    누구 한 사람 자영의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없었다.
    외로움이 죽음보다 두려웠다.
    ‘너는 이 나라를 위해 대업을 이룰 사람이야!’
    준엄하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자영은 순간 물속에서 몸을 솟구쳤다.
    "허억 허억."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민자영, 왕비의 눈빛이 달라졌다.


    왕비는 왕을 모시는 제조상궁을 조용히 불렀다.
    "김 상궁, 주상을 지극히 모시는 자넬 얼마나 든든하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네."
    왕비는 특별히 매화강정과 배수정과를 준비시켰다.
    "망극하옵니다 마마!"
    김 상궁은 곤전의 부름을 받고 긴장하고 있었다.
    "이건 고마운 마음에 대한 정표이니 받아두게."
    왕비는 화사한 물소뿔로 만든 화각함을 열고 주머니를 꺼냈다.
    금실로 수복(壽福)을 정교하게 수놓고 가운데 작은 진주를 박았다.
    "아니옵니다 중전마마! 어찌 소인이 이렇게 귀한 것을요."
    "쉿! 종묘사직의 안위가 김 상궁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
    왕비는 김 상궁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왕비는 김 상궁이 호사스런 주머니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걸 알아냈다.
    대전의 제조상궁은 눈치가 누구보다 빨랐다.
    "중전마마 소인 미련하오나 마마를 위해 뭐든 다할 것이옵니다!"
    왕비의 다부진 눈이 김 상궁 너머를 응시했다.

    (2021년 2월 5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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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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