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2.05 23:00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중전마마께서 상궁들을 다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왕비는 민승호의 말을 들으며 찻잔을 들었다.
    백자에 청화로 작은 꽃을 그린 잔이었다.
    "바깥세상에 그런 소문이 났습니까?"
    왕비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왕비는 궁인 이씨가 왕자를 낳은 후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 불리는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는 대원군의 심복들이었다.
    이 4명이 상궁들의 오라버니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대원군은 상궁들을 촉수처럼 꽂아 대궐 사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 일가 중에 누가 과거에 급제했던가요?"
    "아시다시피 아우 겸호가 장원을 했지요. 규호가 있고요 태호는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다행입니다. 아무쪼록 독려를 많이 해주세요."
    왕비는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알자 하루하루가 살얼음 같았다.
    인현왕후에게는 부친이라는 울타리가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아버지도 없었다.
    "그리고 일가친척 중에 총명한 아이를 한번 찾아봐 주세요."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나라 안팎의 사정을 들으니 심상치가 않아서요. 명석한 아이를 일찌감치 청국에 보내 말도 익히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알아야겠어요."
    "마마의 크고 깊은 생각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민승호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왜놈들 나라 상황도 희한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왕비의 눈이 칼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소리소문없이 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대원군이 아는 날이면 당장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주강(晝講)을 마친 왕은 하품을 깨물으며 김 상궁을 불렀다.
    왕은 이순아에게 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오늘은 일진을 보니 길일이라 곤전마마에게 드셔야 하겠사옵니다."
    왕은 전에 없이 강하게 말하는 김 상궁의 태도에 흠칫 놀랐다.
    "오늘이 길일이라고?"
    "예 마마! 그리고 황송하옵게도 생각하시는 곳이 지금 환경(環經, 월경) 중이옵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김 상궁의 인도를 받아 중전에게로 향했다.
    "상감마마 어서 드시옵소서!"
    전갈을 받은 왕비는 거울만 황급히 들여다본 뒤 왕을 맞았다.
    오랜만에 왕비의 처소에 든 왕은 어색했다.
    "서책을 보고 있었습니까? 무얼 읽고 계셨소?"
    "<춘추>를 읽고 있었사옵니다."
    "여인네가 <춘추>를 읽다니 대단하오. 여전하시구려."
    왕비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기 위해 <춘추>를 숙독하고 있었다.
    "요즘 주강 때 <맹자>를 읽으시지요? 저야 읽고 싶은 곳을 골라서 읽고 따분하면 치워버릴 수 있으니 취미 삼아 읽습니다."
    왕은 왕비의 서글서글한 말에 마음이 편해졌다.
    "대신들과 하는 경연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바삐 돌아가는 세상을 어찌 글로 다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정성은 쏟으시되 너무 부담은 갖지 마시옵소서. <맹자>나 <논어>를 읽지 않고도 요순시대는 열리지 않았습니까. 신하들의 머리를 적절하게 빌리시면 되실 것이옵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왕비의 명으로 화면(花麪)이 나왔다.
    진달래를 녹두가루에 반죽하고 면처럼 얇게 썰어 맑은 오미자 물에 넣은 화면이었다.
    꿀과 잣을 곁들여 달고 고소했다.
    "마마 프디(요)를 배설할까요?"
    왕이 시간 가는 줄 모르자 김 상궁이 여쭈었다.
    "전하 황공하옵니다. 오늘은 소첩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사옵니다."
    왕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했다.
    왕비가 눈물을 머금고 흔감해할 줄 알았는데 이건 무슨 소리인가.
    "알았소. 다음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왕은 대신들과의 주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김 상궁을 불렀다.
    "중전에게 갈 것이다."
    왕은 주강을 하면서도 대신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가슴만 설레었다.

    왕비는 풍만하면서도 고혹적인 모란 같았다.
    단속곳에 단 향낭에선 은은한 사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도 <춘추>를 읽고 있었소?"
    "이것은 연경에서 어렵게 구해온 책이옵니다."
    왕비가 보여주는 책에는 놀랍게도 철포가 그려져 있었다.
    "아! 그럼 이건 병서 아니요?"
    "청국을 유린한 양이(洋夷)들이 가져온 철포라고 합니다."
    "뭐라고?"
    왕은 청국의 사정을 듣고는 있었지만 오랑캐들의 철포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상감마마는 분주하시고 내외의 눈도 있으시니 제가 보고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누구에게도 말씀하시지 마시옵소서. 특히 대원위 대감에게는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알았소. 오늘은 몸이 괜찮소?"
    마음이 은근히 급해진 왕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예 전하."
    왕비가 싱긋 웃자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로 희고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김 상궁이 다섯 개의 연꽃을 형상화한 오봉 촛대의 불을 차례로 끄고 문을 닫았다.
    대조전에는 노상궁들만 남기고 모두 퇴거시켰다.

    진주 가루를 뿌린 왕비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눈썹은 나비가 앉은 듯 선이 짙고 또렷했다.
    구름 같이 풍성한 머리와 복숭아빛 도는 뺨이 왕을 흔들었다.
    왕이 희고 가느다란 목을 쓰다듬자 왕비가 파르르 떨었다.
    입술에서 복숭아향이 돌았다.
    왕비의 분홍색 소고의와 남색 치마를 천천히 풀렀다.
    소고의를 벗기자 보라색 속저고리가 나타났다.
    방 한쪽 향로에선 은은한 향이 나와 두 사람을 감돌았다.
    가느다란 허리와 늘씬한 다리의 종아리가 예뻤다.
    ‘아! 후가 이렇게 예뻤던가!’
    ‘마마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왕의 굵은 코가 왕비의 높은 코를 스치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마마!"
    활쏘기로 다져진 어깨가 왕비를 안아 올렸다.
    왕비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몸 안으로 자신을 힘껏 밀어 넣었다.
    왕비의 입에서 달콤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온 힘을 다해 왕을 빨아들인 뒤 홀리듯 애무하고 놔주지 않았다.
    보드라운 왕비와 하늘을 치솟는 왕의 정기가 어우러졌다.
    강철같은 사내의 정력을 탐닉하고 일으켜 세웠다.
    왕비는 푸른색 같다가 하늘색으로 변하고 다시 검정으로도 변하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왕은 바다의 거대한 파도처럼 힘차게 차오르고 물러섰다 차오르기를 거듭했다.
    두 사람은 맘껏 발산하고 음양의 조화를 만끽했다.
    대조전 병풍에 그려진 천 개의 학이 날아올랐다.
    거북이가 기어가는 사이로 사슴이 커다란 눈망울로 지켜보고 있었다.

    (2021년 2월 12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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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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