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2.12 23:00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민승호는 중전의 분부도 있고 성묘도 할 겸해서 여주로 떠났다.
    일가 중 총명한 아이를 서둘러 찾아보라는 중전의 각별한 분부였다.
    누가 민범호의 아들이 똑똑하다고 해서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민승호와는 촌수가 먼 범호는 과거 대신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한양으로 범호와 그 아들을 불러오고 싶었지만 꼿꼿한 성격이라 쉽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여주의 풍경은 한가로웠다.
    집채만한 짐을 실은 소가 비척거리며 지나가고 가을걷이를 앞둔 터라 아이들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빴다.
    아낙들도 정강이가 드러날 만큼 치마를 걷어 올리고 일에 매달렸고, 한쪽에선 가슴을 드러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민승호가 조랑말에 올라 범호 집을 찾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소를 먹이며 풀밭에 드러누웠는데 지푸라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한 손으로는 귀지를 후비고 있었다.
    "헤헴! 아이야."
    아이는 못 들었는지 꿈쩍도 안했다.
    "헤헴! 이 녀석아 어른이 부르면 냉큼 일어나야지!"
    민승호가 소리를 높이자 그제서야 아이가 부스스 일어났다.
    "왜요?"
    "왜요라니 고놈 참. 민범호의 집이 어딘 줄 아느냐?"
    "그 댁은 왜요?"
    "허허 그건 네 알 것 없고 어딘지 알려다오."
    "이 길로 쭈욱 가면 크은 대추나무가 있어요. 그 뒤가 그 댁입니다."


    민승호는 오랜만에 본 범호를 보고 놀랐다.
    형편이 어렵다더니 영락없는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주경야독하는 수재(秀才)였다.
    민승호는 관직에 있고 중전의 오라버니인 때문에 사람들이 어려워했다.
    하지만 범호는 두 사람이 항렬이 같고 나이가 엇비슷하다는 이유로 존대를 하지 않았다.
    "날 다 찾아오고 무슨 일이신가?"
    ‘이 놈 말하는 것 좀 보게.’
    민승호는 반쯤 말을 트는 범호가 아니꼬왔지만 꾸욱 참았다.
    "잘 지냈는가? 내 들으니 자네 아들이 영특하다고 해서 한번 보고싶어서 왔네."
    "태웅이 말인가? 그 아이는 왜?"
    "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입조심하게. 중전마마께서 일가 아이중에서 총명한 아이를 좀 찾아보라 하셨거든. 그런데 태웅이라 했는가? 왜 영(泳)자 돌림자를 쓰지 않았나?"
    "항렬자 말하는 건가? 쳇 그 항렬이란 것 때문에 이 나라가 이 꼴 되지 않았나 싶네."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야?"
    "항렬자란 게 무언가? 굴비 엮듯이 같은 항렬로 꿰어서 어느 가문의 몇 촌쯤 되는지 알아보게 만든 거 아닌가? 니편 내편 가르고, 잘 보이려고 한 눈에 알아보려고 만든 것 아니냐 말야. 서로 돌아가면서 해 먹으려고 말야. 안동 김가들이 그 짓을 하지 않았나. 여흥 민씨도 마찬가지지만. 내 그래서 일부러 아이 이름에선 돌림자를 빼버렸어."
    "정 그렇다면 자네 이름에서 호(鎬)도 버리지 그랬나?"
    "마음 같아선 개명을 하고 싶지만 아버님이 내려주신 거라 참고 있는 거지."
    ‘거참 괴이한 녀석이네.’
    민승호는 짜증스러워 박차고 일어서고 싶었다.
    "쯧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자네 아이부터 좀 불러 보게나."
    볕에 그을리고 뺨이 폭 들어간 범호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아들을 찾아오라 시켰다.

    땋은 머리인 아두(丫頭)를 한 사내아이가 들어오는데 아까 소를 먹이던 녀석이었다.
    "아저씨에게 인사 올려라."
    ‘허허 이거 참.’
    민승호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먼길을 왔는데 헛수고한 거 아닌가 싶어 부아가 치밀었다.
    "네가 태웅이냐? 올해 몇 살이더냐?"
    "예. 열 살입니다."
    아이의 눈을 보니 크고 맑은 눈에 총명함이 보이긴 했다.
    "글은 어디까지 읽었느냐?"
    "<논어>와 <맹자>를 읽었습니다."
    "음 그러면… <맹자>에서 맹시사의 용(勇)에 대해 말해 보거라."
    태웅은 심드렁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범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맹시사(孟施舍)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용사입니다."
    태웅은 한 낮의 햇볕이 나른했던지 하품을 했다.
    "맹시사를 통해 선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理)가 곧으면 기(氣)가 건장하게 되고 이가 굽으면 기가 위축됩니다. 이와 기는 하나의 심(心)에서 나옵니다. 마음의 근본은 잘 닦은 거울과 같아서 세상의 어떤 것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가져 이치를 밝히고 기를 잘 길러서 내외가 서로 부합되고, 스스로 반성하여 가책을 느낄 것이 없으면, 어떤 때라도 옳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성인의 큰 용맹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오! 제법이구나!"
    민승호는 무릎을 쳤다.
    "실은 중전마마께서 영특한 아이를 가려내어 청국에 보내고자 하셨네. 연경에 보내어 한어를 익히고 새로운 문물을 배우게 한다는 계획이시지."
    "역관도 아닌데 뭣땜에 청국까지 가겠나. 아이도 어리고 집에 손도 부족하니 곤란하네."
    "허허 이 사람 중전마마의 뜻을 거역할 것인가! 집안 형편이 어려운 건 우리 집 소출을 덜어서라도 돕겠네. 태웅이가 연경에서 배우고 머무르는 경비도 알아서 할테니 걱정말게나."
    범호는 아들을 쳐다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버님!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태웅은 농삿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초계는 자영이 중전이 되자 궁궐과 사가를 오가며 심부름하는 통지기로 남았다.
    민승호의 집에서 기거하는 초계는 중전의 중요한 손발이었다.
    중전의 심중을 잘 헤아리고 언문뿐 아니라 한문도 어느 정도 알았다.
    초계는 혼기를 훌쩍 넘겼지만 시집을 가지 않았다.
    눈매는 크고 요염했고 붉고 두툼한 입술은 촉촉했다.
    암팡진 얼굴과 풍만한 몸매가 사내들의 눈길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가끔 창을 하기 때문에 목소리는 굵고 거칠었다.
    몇몇 부호가 초계를 측실로 맞고 싶다고 달려들었지만 실패했다.

    초계는 여주에 남아있는 어머니도 볼 겸 민승호를 따라나섰다.
    벗이었던 봉이도 만나기 위해 빨래터였던 냇가로 찾아갔다.
    이끼가 잔뜩 낀 돌을 보자 10년 전 미끄러졌던 기억이 확 끼쳤다.
    허우적거리던 자신을 끌어내던 달수.
    ‘달수는 어찌 살고 있을까. 장가들어서 마누라 새끼들과 잘살고 있겠지.’
    달수네는 큰아버지가 곤욕을 치르자 정읍으로 도망가다시피 했다는 말만 듣고 이후론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달수의 싱그런 웃음과 넓고 편안한 가슴을 잊은 적이 없다.
    봉이를 기다리다 지친 초계는 뻣뻣해진 다리를 털고 일어섰다.
    민승호가 밤에 손님들이 올 터이니 가야금을 준비하라고 했던 것이다.
    초계는 이때 맞은편에서 누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장옷으로 얼굴을 가렸다.
    첨벙첨벙.
    사내는 물살을 헤치며 넘어질 듯 황급히 건너오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가무잡잡한 얼굴….
    달수? 그럴 리 없어. 한양에서도 몇 번이고 달수인 줄 알고 따라갔다가 얼마나 망신을 당했던가.
    "초계 아니여?"
    사내의 굵은 목소리를 들은 초계는 휘청했다.

    (19화는 2021년 2월 19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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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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