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줄 서평]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입력 2021.02.16 06:00

한국전쟁, 학살, 대중의 편견, 악의 속에서도 살아남은 한 여성 예술가가 있습니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는 ‘살아남은 여성 예술가’ 심시선을 잊지 않으려는 딸과 아들, 손녀와 손주들의 따뜻한 분투를 그립니다.

후손들이 결코 잊지 않고 싶어하는 심시선과의 명랑한 일화들 속에는, 젊은 세대가 갈구하는 따뜻한 ‘어른’의 이상향이 담겨 있습니다.

심시선은 아픈 아이를 키우며 ‘독서’에 집착하게 된 며느리에게 "별의별 것에 대해 읽는, 애벌레처럼 읽는 사람은 결국 쓰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부담 없는 위로를 건네는 노인이었습니다.

손녀들을 만날 때마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팁 하나와 액세서리 하나를 건네주던 심시선은, 구구절절한 위로보다 따뜻한 제스처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할머니이기도 했습니다.

밀레니얼이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정세랑의 세계를 좇다보면 한국 소설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던 모두가 사랑하는 어른과,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서로를 응원하는 가족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사랑하는 지난 세기의 예술가들에게 당연히 누렸어야 했을 것들을 가상으로라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시선으로부터, / 문학동네
시선으로부터, 10줄 발췌

1.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할머니와. 할머니는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으며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2.할머니는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았는데 세상을 뜨고 십년이 지나자 사람들이 어디선가 자꾸 조각 글과 영상 들을 발견해냈다.

3.난정이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된 것은 아이가 아팠던 시기와 겹쳤다. 아픈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져서,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보호법이었다.

4.수희공덕을 풀어쓰면 다른 사람이 이루는 공덕을 함께 따라 기뻐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질투 없는 마음이 또 있을까? 문화계에 몸담고 있다보면 어찌나 자주 질투에 빠지는지 모른다. 질투 없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비틀린 데 없이 환한 안쪽을 가진 이만이 가능한 경지, 범인은 끝내 다다르지 못할 경지일지 몰라도 목표로 삼으려 한다.

5.어떤 말들은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의 억울해하는 말 같은 것들은. 규림은 천천히 생각했고 그렇게 여과된 것들을 끝내 발화하지 않을 것이었다.

6.시선이 쓴 대로 ‘어떤 자살은 가해’였고, 그 가해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시선을 원망했다. 화수에게 시선은 어른 그 자체였고, 그 어른이 더 무겁고 더러운 사슬 같은 것을 끊어줘서 화수에게까지 오지 않도록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겼던 듯했다.

7. 미국을 봐. 2차대전 때 군국주의자들이랑 싸웠다는 것만으로 정의의 편인 것처럼 굴지만 하와이에 한 짓을 봐.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한 짓도. 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제국주의자인 걸 몰라. 인정을 안 해.

8.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9.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10.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 구나 싶고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삼아 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은주 기자 leeeunj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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