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2.19 23:00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첨벙첨벙.
    빛이 물 위로 반사되어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인데, 달려들 듯 뛰어오는 사내를 보자 초계는 벌떡 일어섰다.
    두 다리가 달달 거리며 떨렸다.
    거센 물살을 가르며 뛰어오는 사내는 금세 물에 빠질 듯 위태로웠다.
    ‘설마 달수인 거야? 그럴 리가 없어.’
    "헉헉 초- 초계 맞지?"
    건너온 사내는 쓰러질 듯 엎드려 어깨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사내의 젖은 옷에선 물비린내가 났다.
    초계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몸을 휘딱 뒤집어 두 다리를 뻗으며 초계를 올려다보았다.
    "나 달수여."
    어릴 적 모습은 가무잡잡한 얼굴과 고른 이가 전부였다.
    헤헤거리던 모습은 없어지고 키는 훌쩍 커지고 떡 벌어진 어깨가 사뭇 달라 보였다.
    가장 달라진 것은 눈빛이었다.
    그저 크고 맑았던 눈이 애수를 띤듯 깊은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것이 얼마 만이여? 살아있으니 만나긴 만나는구먼 하하."
    달수는 초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홍 저고리에 남색 갑사 치마를 입은 초계는 치맛자락을 슬며시 잡으며 꽃처럼 앉았다.
    달수 머리에 상투가 없었다.
    "그동안 어찌 지냈냐?"
    숨을 돌린 달수가 그 싱그럽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꿀단지를 바라보는 눈이랄까 안아 들고 쪽쪽 빨아들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초계가 조용히 가쁜 숨을 내쉬자 꼭 쳐 매고 있던 저고리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달수는 밥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초계의 탐스런 가슴에 자꾸 눈이 갔다.
    달수가 슬그머니 초계의 손을 잡았다.
    초계도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아니 얼싸 안아보고도 싶었다.
    "난 아기씨 모시고 한양 갔다가…아기씨가 중전마마가 되신 건 아니?"
    "아! 그래?"
    달수는 고개를 떨구고 뭔가 생각에 빠졌다.
    "아기씨가 널 이뻐하셨지?"
    "그럼! 지금도 궁궐을 드나들며 중전마마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는 걸."
    초계는 머리를 매만지면서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급히 초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초계야 초계야 이 기집애는 어딜 갔어."
    친구 봉이였다.
    "쉿!"
    초계는 달수의 손을 잡고 잽싸게 소나무 숲으로 숨었다.
    봉이는 소나무 숲 가까이 와서 연신 소릴 질렀다.
    "이 기집애가 어딜 갔누. 민 대감이 빨랑 들어오라고 난린데."
    봉이는 몇 번 더 주위를 훌훌 둘러보더니 사라졌다.
    "민 대감이 널 왜 찾는대?"
    달수의 눈에 불만이 가득했다.
    "오늘 밤에 수령이랑 김진사랑 몇 사람 부른다고 날더러 소리를 하라고 하네."
    "뭐 김진사 그놈도 오는 거야?"
    김진사란 말에 달수의 눈에 핏줄이 섰다.
    10년 전 달수가 김진사 하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을뻔 하다 살아났던 기억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으음…."
    달수의 눈이 소름끼칠 정도로 사납게 변했다.
    큰아버지는 김진사의 땅을 부쳐 먹다 횡포를 당하지 못해 관에 소지(所志)를 올렸다 절단이 났다.
    김진사는 큰아버지를 거꾸로 매달아 매타작을 벌였고 이를 말리던 달수가 하인들에게 달려들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찢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채 멍석에 말려 내던진 달수를 아버지가 몰래 업고 도망쳤던 것이다.

    당시 철종 치세 말년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극성을 이룰 때였다.
    안동 김씨들은 ‘강화도령’ 철종을 왕위에 올려놓고 나라와 조정을 주물렀다.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세도 정치를 열었고, 조카인 김문근 역시 철종의 장인이 되면서 세도를 이어갔다.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은 영의정으로 세도의 중심에 서고 아들 김병기는 호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머쥐었다. 김문근의 조카 김병국과 김병학은 각각 병조판서와 예조판서였다.
    김씨 일문에서 근(根)자 돌림과 병(炳)자 돌림이 서로 주고받으며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안동 김씨에게 재물을 바치고 벼슬을 사고 뒷배를 보장받은 수령과 아전들은 그악스럽게 농민들의 피와 땀을 쥐어짰다.
    보릿고개 때는 솔잎가루로 죽을 쑤어먹다 똥구멍이 막혀 찢어졌다.
    수탈이 심해지고 재해까지 겹치면서 철종 12년(1862년)에는 진주를 시작으로 민란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광대나 기생을 부를 것이지 왜 널 찾는대? 니가 기생이냐?"
    달수는 울컥해서 되려 짜증을 냈다.
    "뭐라고 기생? 씨 기생은 아니고 아직 그 집 종년이다!"
    초계는 부아가 치밀어 홱 내뱉었다.
    "그렇게 이뻐하면 속량(贖良)이라도 해줄 것이지…."
    "뭐라 했어? 속량?"
    초계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초계는 달수를 기다렸다. 언젠가 큰돈을 벌어 나타나 자신을 속량해줄 거란 꿈이 있었다.
    그때는 자신도 양인이 되어 달수와 새끼 낳고 정답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종년이 낳은 자식은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반집에서는 여종이 바람기가 많아 싸돌아다니다 애를 배도 생구(生口)가 하나 더 늘었다며 은근히 반겼다.
    그러나 양인들은 여종의 자식도 종이 되기 때문에 부부가 되는 걸 꺼렸다.
    달수는 종년의 신세라도 기꺼이 받아줄 줄 알았다.
    초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톰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돌아가신 스승님은 집안에 여종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며느리로 삼고 하나는 양딸로 삼으셨다고 하더라. 그런 분이 천하에 없기는 하지만…."
    멍해진 초계의 머리에 달수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디로 갔어 이 시러배놈 같으니라구!"
    컹컹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사내 네 명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달수는 초계와 자신의 몸을 수풀 아래로 바짝 숨겼다.
    김진사집 하인 셋과 백정 한 명이 숨차게 달려왔다.
    "이 새끼 오늘 잡히면 이번엔 죽여서 묻어버린다!"
    한 명이 눈에 살기를 띄며 이빨을 드러냈다.
    달수의 아버지는 반송장이 된 아들을 데라고 떠나면서 울분을 참지못해 김진사 하인들이 잠자던 행랑채에 불을 던지고 도망갔던 것이다.
    세 명은 몽둥이와 곡갱이를 들고 날뛰는 사냥개를 앞세우고 왔고, 한 명은 시퍼런 칼을 들고 설쳤다. 김진사 집의 소 돼지를 도맡아 잡는 백정이었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왔어?"
    "지 큰 애비 상 치른다고 온 거 같은데 니놈까지 줄초상날줄 알아라!"
    사냥개를 앞세운 하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초계가 튀어 나가며 손가락을 베어 물었다.
    다홍저고리와 갑사 치마에 피가 흘렀다.
    초계는 힘껏 달음박치기 시작했다.
    하인들이 사냥개를 끌고 초계를 향해 뛰었다.
    "게 섰거라!"
    초계는 사내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년아 누군데 갑자기 튀어나와 도망치는 거야?"
    피 냄새를 맡은 사냥개가 길길이 날뛰며 덤벼들 듯 했다.
    철썩!
    초계가 멀찌감치 달아나는 달수를 힐끗 보며 한 놈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 개 같은 놈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중전마마를 뫼시는 초계를 모르더냐! 내 의금부에 고해 너희들을 당장 물고를 낼 것이야!"

    (20화는 2021년 2월 26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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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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