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2.26 23:00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여주에 살던 태웅은 민승호가 즉각 불러들여 한양으로 왔다.
    "태웅아 널 다음에 떠나는 사행에 끼워 넣기로 했다. 연경에서 한어(漢語)를 잘 배우고 그곳 사정을 소상히 보고 오너라. 그때는 궁궐로 들어가 중전마마를 알현할 수 있게 해주마."
    북경 사행에 앞서 태웅은 역관에게 한어의 기초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드디어 출발이었다.
    태웅은 사행의 수장인 정사(正使)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참여했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 3사(三使)에게는 자식이나 친척을 ‘자제군관’이란 이름으로 데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양 모화관(慕華館)에서 출발하는데 3사와 무관인 비장(裨將)들, 말을 다루는 마두(馬頭) 외에 의원과 화원까지 수십 명이 일행을 이뤘다.
    도화서 소속인 화원은 연경에서 지도나 그림을 베껴오는 일을 맡았다. 의원은 내의원과 혜민원에서 번갈아 오는데 이번엔 혜민원 의원이 끼였다.
    일행 중 가장 연소한 태웅은 힘차게 말 위로 솟구쳐 앉았다.
    갈색 털에 정수리가 하얀 말은 몸에 윤기가 흘렀다. 눈이 맑고 새까매 마음에 들었다.
    태웅은 안장 주머니에 먹과 붓 종이 벼루 등을 넣고 뒤쪽에는 여분의 짚신을 단단히 매었다.
    ‘연경엘 가보다니!’
    태웅은 가슴이 벅차올라 울컥했다.
    사행단의 이불과 작은 장롱을 잔뜩 실은 짐말들은 힘 겨운듯 뒤뚱거렸다.
    첫날은 40리를 지나 관리들을 위해 지은 객관인 벽제관과 주변 숙소에서 묵었다.

    태웅은 하루에 많게는 100리까지 가야 하는 여정에 지치기 시작했다.
    정사는 주로 수레나 가마를 탔지만 태웅은 하루종일 말 위에서 버티려니 힘이 들었다.
    일행이 활기를 찾은 것은 평양 연광정에서였다.
    평양 부윤이 사행단의 노고를 위로한다며 연회를 베푼 것이다.
    피리 젓대 해금 장구 소리가 하늘 높이 울리고 기녀들이 우르르 등장했다.
    16세에서 20세를 넘지 않은 기녀들이 비단옷을 입고 나와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햐 역시 평양이로구나!"
    무뚝뚝하던 정사의 눈과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비장과 하인들도 구경거리에 신이 났다.
    가을바람이 소나무를 희롱하고 밤하늘에 둥실 뜬 달은 여인의 가슴 같았다.
    정사는 연회에 태웅도 불렀다.
    "이 아이는 중전마마의 종질(從姪)인 민태웅이라 합니다. 고을에선 신동으로 유명하다 합니다."
    정사가 평양 부윤에게 태웅을 소개했다.
    "태웅이라고 하옵니다."
    "하! 지금까지 여러 사행을 보았지만 이처럼 어린 소년은 처음입니다."
    이때 휘향이라는 기생이 태웅에게 다가와 앉았다.
    옥 같은 피부에 그린 듯 얇게 찢어진 눈이 남자의 깊숙한 곳을 찌르는 듯했다.
    요염함은 홍매의 자태였다.
    그러나 감춰진 눈빛은 ‘네까짓 것들’ 하는 쪽이었다.
    휘향은 태웅의 빰을 살짝 만지며 웃었다.
    "이 솜털도 가시지 않은 도련님은 뉘신고."
    다른 기생들도 태웅에게 몰려들어 뺨을 만지고 손을 부비기도 했다.
    명금이라 불리는 기생은
    "잘 여물었소? 호호호."
    하며 농을 던졌다.
    "명금아 무슨 소리냐! 벌써 장가들 나이가 되셨는데."
    옥경이란 기생은 가락지 낀 손을 휘휘 저으며 명금을 나무랜 뒤 태웅의 턱을 슬쩍 건드렸다.
    ‘화를 내야 하나?’
    태웅은 귓볼까지 빨개졌지만 정신 없이 예쁜 기녀들이 싫지만은 않았다.
    "허허 영감님을 놔두고 무슨 수작들인 게야! 휘향이는 어서 이리 와 술을 올리거라."
    평양 부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야단을 친 뒤 정사에게 은근하게 말했다.
    "저 휘향이가 평양에서는 으뜸입니다. 절색일 뿐 아니라 시도 일품입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나오라 해도 병탈을 하며 안 나오더니 오늘은 어인 일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안 나오면 볼기를 치려 했거늘 하하하."
    "도련님이 얼굴만큼 글도 잘하게 생겼네. 앞으로 풍류랑이 되실 듯하오. 그땐 꼭 이 휘향이를 찾아오시오."
    휘향은 태웅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예예 소첩 나으리께 술 한 잔 올리옵니다."


    "여기가 의줍니다."
    태웅의 말을 다루는 견마잡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의주에는 사행 일행과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들어가려는 장사치들, 짐을 가득 실은 말들이 몰려 정신이 없었다.
    서장관과 의주 부윤의 지휘 아래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의 이름과 거주지, 나이, 수염이나 흉터가 있는지, 키가 작은지 큰지를 소상히 적었다. 말은 털 색깔까지 적었다.
    "저들은 뭣들 하는 것이요?"
    태웅은 견마잡이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들판에 짐을 죄다 풀고 겉옷까지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던 것이다.
    "청나라에 물건을 숨겨 들여가는 걸 잡는다고 저 야단입니다요. 조선 돈도 한 푼 가져가선 안 됩죠. 걸리면 엉덩이를 까고 볼기를 맞아요. 상투까지 풀어서 뒤지고 바지 안까지 손을 넣어본다니까요."
    사행단의 비장이나 역관들은 행장만 풀어 뒤져보았다.
    조사를 마친 사람들은 서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벗어놓은 옷과 짐을 챙겼다.
    장사치들 틈에 한 명이 아까부터 태웅에게 시선을 꽂고 있었다.
    얼굴은 말상이고 6척에 가까운 장신의 사내였다.
    "저 위인은 누군데 자꾸 날 쳐다보오?"
    "거-의주 장사치 같은뎁쇼. 의주 장사치들은 쬐그만할 때부터 되놈들 말을 배워 수완들이 좋습니다. 저쪽 장사치들하고도 트고 지냅죠. 보통내기들이 아니니 조심하세요."

    사행단은 의주 부윤의 전송을 받으며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에 닿았다.
    "여기가 구련성이란 곳이다. 고구려의 땅이었지."
    잠깐 졸고 있던 태웅은 ‘고구려’란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글로만 읽었던 고구려 땅이 이곳이란 말인가!’
    태웅은 이규보의 시 <동명왕편>를 읽고 한동안 밤마다 고구려 꿈을 꾸었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가 고구려와 주몽에 대해 쓴 시가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태웅은 얼른 흙 한 줌을 종이에 싸서 염낭에 넣었다.
    문득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이 찔끔 났다.
    정사가 파발편에 집으로 안부 편지를 부치던데, 자신도 한 줄 보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구련성에는 마땅한 숙소가 없어 노숙을 하기로 했다.
    군졸들이 흩어져 도끼로 나무를 찍어 댔다.
    정사와 3사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역졸과 마부들은 몇 명씩 나뉘어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임시 숙소로 들어갔다. 장사치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냇가에선 저녁을 짓기 위해 잡은 수십 마리 닭을 씻었고 한쪽에선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았다.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치느라 시끌시끌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자 화톳불로 어둠을 밝혔다.
    뿌아앙-
    "야얏-!"
    군졸이 나발을 힘차게 불자 사람들이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호랑이가 뛰어드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자수정 같은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21화는 2021년 3월 5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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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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