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3.05 23:00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책문 통과를 앞두고 일행이 긴장했다.
    책문을 넘어서면 청국이었고 그 때문에 통과 절차가 까다로웠다.
    우르르 책문으로 청국인들이 몰려나와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저 치들은 누군데 저리 험상궂게 나대나?"
    부사가 역관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정사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뭐라도 트집을 잡아 더 뜯어내려고 저럽니다."
    "대강 넘겨주고 가야지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네."
    부사는 정사의 눈치를 보며 대신 나섰다.
    "그게…저놈들한테 자꾸 뜯기면 다음에 오는 사행들이 또 더 가져와야 해서요."
    역관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우당탕탕 하며 벼락같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커다란 독을 들어 바닥에 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이런 도둑놈들 같으니라구! 지난번에도 천자님께 올리는 방물 수레에서 비단을 훔쳐가더니 이번엔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리고 있어! 대갈통을 부셔버릴까 보다 어느 놈이야!"
    그는 변발한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고 번쩍 들어 올렸다.
    사내는 숨이 막혀 캑캑대며 발버둥쳤지만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태웅은 깜짝 놀랐다.
    그자는 태웅을 흘금흘금 훔쳐보며 주위를 맴돌던 의주 상인 아닌가.
    체격은 장신이지만 이렇게 담력이 센 장사인 줄은 몰랐다.
    의주 상인은 움켜쥐었던 자를 홱 내동댕이치고 다른 자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누구야 또 지껄여봐! 입을 확 찢어놓을테니!"
    모두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가운데 변발을 한 다른 사내가 나섰다.
    번듯하게 생긴 그는 의주 상인의 허리를 껴안으며 미소지었다.
    "그만 화 푸세요."
    의주 상인은 그제서야 옷을 탁탁 털며 얼굴을 풀었다.
    부사가 역관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뭐 저래까지 할 거 있는가?"
    "저러지 않으면 당합니다. 지금 책문 아전들에게 주는 예물만 해도 어딘데요. 봉성장군 2명과 어사 1명 해서 모두 102명에게 장지 156권, 백지 469권, 청서피 120장, 담뱃대 74개, 부채 288개, 대구 74마리, 은장도 7자루…다 읊으려면 숨이 넘어갑니다. 이걸 다 주는데도 더 뜯으려고 저런 다니까요 쯧쯧."
    태웅은 황제에게 올리는 것도 아니고 책문 관리들에게 줘야 하는 예물의 규모를 듣고 기가 막혔다.


    드디어 연경이었다.
    연경에 이르는 돌길에는 쇠로 만든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지나가 귀가 멍할 지경이었다.
    황성의 높이는 수십여 장에 이르고 3층 문루가 높아 하늘에 떠있는 듯했다.
    자금성은 주홍빛 석회를 바르고 황색 유리기와를 얹었다.
    태웅은 크고 웅장함에 놀라 이런 세계도 있었나 싶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웅장미가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저택처럼 정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일행은 조양문으로 들어가 조선 사신들의 객관인 회동관(會同館)으로 향했다.
    정사는 장무관에게 명해 청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과 자문을 예부에 올리라고 지시했다.

    군관 자격으로 사행에 따라온 김시은이 역관 한 명과 태웅을 데리고 성안 구경에 나섰다.
    "친구들이 부탁한 서책들이 있는데 먼저 유리창으로 가세."
    뾰족한 얼굴이 멸치 같아 보이는 김시은은 역관을 앞세우고 유리창으로 갔다.
    유리창 서남쪽에 대형 서점들이 많아 조선에서도 유명한 곳이었다.
    보문당, 대문당 같이 유명한 서점들이 6리에 걸쳐 뻗어 있었다. 3층까지 올린 서가마다 청국에서 모아놓은 전적들로 그득했다.
    "허 거 참 대단해! 이 책들 죄다 쌓아놓으면 한양의 남산만 하겠는걸."
    김시은은 쇳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서점 옆으로는 서화와 지필묵, 안경·술잔·시계를 파는 점포가 줄지어 있고, 술집·음식방·철물전·의복전이 끝없이 이어졌다.
    ‘온 세상의 재화를 모두 갖다 놓은 것 같아!’
    태웅은 진기한 광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친구가 <선녀내경>이란 책을 사달라던데 한번 물어봐 주게."
    역관이 김시은의 말을 듣고 서점 주인에게 물었다.
    담뱃대를 쥔 서점 주인은 서가를 한번 훑더니만 고개를 저었다.
    무표정한 서점 주인은 태웅을 보더니 뭐라 중얼거렸다.
    "뭐라 하나?"
    김시은이 답답한지 역관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그 책은 여기 없다고 합니다."
    역관이 태웅을 손으로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소공자의 관상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네요. 매우 총명하고 앞으로 귀하게 될 상이라고요. 그런데 주위에 여자도 많을 거랍니다."


    다리가 퍽퍽해진 김시은은 태웅과 역관을 데리고 음식방으로 들어갔다.
    "내 이번에 연경은 처음이니 상다리 부러지게 먹어보세. 잘 좀 안내해주게. 언제 또 연경에 와 보겠나. 재밌는 곳도 많다고 하더구먼 하하하."
    김시은이 역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이윽고 북쪽 지방 명주인 계주주에다 삶은 돼지·닭찜·오리고기·잉어·양곱창·백반·호떡·사과·포도·밤·호도·귤병·땅콩·곳감·생감이 오른 커다란 교자상이 나왔다.
    "햐 이거 눈 튀어나오겠는걸."
    "천천히 많이 드십시오."
    "잘 먹겠습니다."
    태웅도 몹시 시장하던 터라 침이 떨어질 정도였다.
    역관은 술이 거나해지고 배가 부른 김시은과 태웅을 데리고 목욕갱으로 갔다.
    "이런 곳은 처음이시지요?"
    50명이 넘는 사내들이 벌거벗고 따뜻한 물에 씻고 있었다. 훈기가 가득 차 조금만 있어도 땀이 흘렀다.
    "휴- 너무 개운합니다. 청국에는 이런 곳도 있네요."
    제대로 씻지 못했던 태웅은 모처럼 제대로 씻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양반 체면에 옷을 홀랑 벗어 부끄러웠지만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 배도 부르고 몸도 깨끗해졌으니 진짜 재밌는 곳으로 모실까요?"
    역관이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김시은을 쳐다보았다.
    "어 어디로 가는 건가? 흐흐. 혹시 ‘양한적(養漢的)’한테 가는 건가?"
    김시은이 슬쩍 태웅의 눈치를 보았다.
    "하하 뭐 이것저것 많이 들으셨나 봅니다. 거긴 아니고 화신묘란 곳으로 모실렵니다."
    "화신묘? 거기가 어딘고?"
    무안해진 김시은이 쫑쫑한 수염을 만지며 물었다.
    "연경 미녀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곳입지요. 구경해볼 만합니다."
    화신묘에는 수레들이 몰려 있는데 짙은 화장을 하고 머리에 꽃으로 치장한 여염집 미인들이 앉아 있었다. 시녀들은 김시은에게 ‘조선에서 가져온 청심환이나 부채가 없느냐’고 물었다.
    태웅은 미녀도 좋지만 한 쪽에서 벌어지는 환술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자 김시은은 태웅이에게 환술을 보고 있으라고 하고 역관과 함께 사라졌다.
    환술쟁이 한 명이 알몸을 보여주며 몸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줬다.
    잠시 후 두 다리 사이에서 유리병이 나오고 그 속에 금붕어가 뛰어노는 것이 아닌가.
    "와! 대단해 대단해!"
    태웅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옆으로 더 가니 개가 원을 그리며 뛰는데 그 위로 원숭이가 폴짝 뛰어올라 나발을 불어댔다.
    태웅은 환술을 구경하다 길을 잃었다.
    어느덧 해는 지고 사람들은 더욱 몰려들어 바다같았다.
    태웅은 우두커니 서서 김시은과 역관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탁!
    누군가 태웅의 등짝을 쳤다.
    "여기서 뭐 하슈?"
    빙긋이 웃고 선 사람은 의주 상인이었다.

    (22화는 2021년 3월 12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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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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