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3.12 23:00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여기서 혼자 뭐 하슈?"
    의주 상인은 빙그레 웃으며 태웅을 바라보았다.
    "역관을 놓쳐버렸어요."
    "그럼 나랑 다닙시다, 내가 연경은 좀 아니까."
    이때 갑자기 한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비단옷을 정갈하게 입은 소녀를 앞에 두고 환술쟁이가 묘기를 보이려는 순간이었다.
    소녀는 환술쟁이의 현란한 손놀림에 넋을 잃고 있었다.
    "얍!"
    환술쟁이가 괴성을 지르며 긴 손가락을 뿌리자 소녀의 머리 위에 금으로 만든 꽃이 피었다.
    와-
    구경꾼들은 저도 모르게 황금꽃을 갖기 위해 달려들었고 그 바람에 소녀가 넘어졌다.
    "어 어!"
    "사람이 깔렸어!"
    "어서 비켜!"
    "악! 내 다리!"
    사람들이 서로 깔리고 엎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애가 위험해!"
    태웅은 사람들을 힘껏 밀치며 뛰어들었다.
    "양비(洋匪)다!"
    누군가 양비라고 외치자 십여 명의 서양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북경을 잔인하게 약탈한 영국과 프랑스군을 기억한 사람들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아이야 괜찮니? 눈 좀 떠봐!"
    소녀는 기절했는지 축 늘어졌다.
    태웅은 순간 염낭에 간직하고 있던 청심환을 급히 꺼냈다.
    청심환을 재빨리 씹어 부드럽게 녹인 뒤 소녀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잠시 후 소녀가 눈을 뜨더니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옥주야 옥주야!"
    머리에 쌍상투를 맨 소녀가 뛰어왔다.
    서양인들은 태웅과 두 소녀를 슬쩍 보더니 바삐 사라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한 사내가 "저 사람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쌍상투 소녀에게 말해주었다.
    "동생을 살려줘서 고마워요. 집으로 가야 하는데 아이를 좀 업어주세요. 나는 양옥기라고 합니다."
    "아이 귀찮은데 그냥 갑시다."
    의주 상인은 코를 씰룩이며 태웅의 소매를 끌었다.
    "그럼 내가 업어야지."


    옥기라는 소녀가 데리고 간 곳은 저택이었다.
    높고 커다란 대문 앞에 정교하게 다듬은 돌거북 한 쌍이 마주 보며 엎드려 있었다.
    마당은 몇 대의 마차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매화와 대나무가 보기 좋게 심어져있고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화려하게 칠한 정자 위에는 찻잔과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반짝이는 검은색 오금(烏金) 향로에는 향이 여유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세밀하게 조각한 나무 난간에는 값비싼 침향을 발라 향이 코끝을 찔렀다.
    꽃무늬 가득한 융단이 깔리고 비자나무로 만든 탁자 위에는 붓과 벼루, 종이가 보였다.
    옥기라는 소녀가 안으로 들어간 뒤 좀 더 언니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동생을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양옥린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 자매인데, 옥기와 옥주가 놀러 나갔다 변을 당했네요. 하인을 붙여서 보냈는데 민망하게 됐어요."
    태웅은 한양에서 한어를 배웠지만 막히는 부분은 종이에 붓으로 써가며 필담을 나눴다.
    만주족인 옥린은 태웅보다 세 살이 많았고, 둘째 옥기는 태웅과 동갑이었다. 옥주는 아홉 살이었다.
    이때 둘째 옥기가 나타났다.
    약간 새침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씻은뒤 붉은 비단옷으로 갈아입으니 딴사람 같았다. 옥기는 가무잡잡한 얼굴에 광대뼈가 두드러졌는데 눈빛이 저돌적이면서 사람을 끌었다.
    옥린은 소젖같이 희고 고운 피부와 은은한 쌍꺼풀, 날렵하면서 죽 뻗은 코가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촉촉하면서도 따뜻하고 상냥한 눈빛과 표정이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놓았다.


    태웅은 꼭 하루 묵고 가라는 옥린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녁 교자상에는 닭찜과 삶은 돼지, 양 내장국, 거위고기, 포도, 설리(雪梨), 오화당(五花糖), 귤병과 임안주(臨安酒)가 나왔다.
    세 자매와 함께 젊은 사내도 동석했다.
    기운을 차린 막내 옥주는 태웅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읍을 한 뒤 방긋방긋 웃었다.
    옥주가 큰 언니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저 분 잘 생겼어"라고 말했다.
    태웅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 사람은 아버지의 제자 강무라고 합니다."
    젊은 사내가 태웅을 보며 가볍게 목례를 했지만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아버지는 한림원 관직에 계셨는데 지금은 상해에 가셨어요. 증국번 총독님의 명을 받고 가신 겁니다. 증국번 총독님은 아시죠? 공자님은 연경에 어떻게 오게 됐나요?"
    "청국말을 배우려고 왔어요. 그리고 양이(洋夷)에…..."
    "네 양이요?"
    태웅은 양이가 청국에 쳐들어온 경위와 이후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는 말은 황급히 감추었다.
    "우선 청국말부터 익히고 서양 오랑캐 말도 배우려고요."
    "그러시군요. 양이들 말을 배우려면 연경에도 학교가 있긴 하지만 상해에 있는 광방언관(廣方言館)이 더 좋아요."
    "광-방-언-관이요?"
    태웅은 기억하려고 되뇌었다.
    "네. 아버지한테 들었어요. 둘째 옥기도 그곳에 입학시킬 생각이래요."
    통통한 얼굴의 옥주가 살그머니 큰언니 곁에 와서 또 뭐라 속삭였다.
    "호호 막내가 자기는 영어를 배운 뒤 영국으로 유학갈 거라는군요."
    "예? 영국으로 유학을 가요?"
    태웅의 눈이 대문짝만해졌다.
    "네 증국번 선생님이 아주 어린 학생들을 보내야 한다고 황제께 상주하셨대요. 아버지는 막내 옥주를 보내고 싶으신가봐요. 만약 상해에 갈 마음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드릴게요. 마침 강무가 내일 상해로 가요. 강무는 상해에서 영국말을 배워서 활약을 하고 있어요."
    말없이 닭고기를 씹던 강무의 얼굴이 잠시 환해졌다.
    포도알을 뜯어 입으로 가져가던 옥기가 삐뚜름하게 태웅을 쳐다보았다.
    "옥기는 좀 특이한 아이예요. 군관 학교에 들어가고 싶어해요."
    옥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고, 옥기는 흥 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양옥린의 집에서 하루 묵기로 한 태웅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 때 마신 임안주 때문인지 몸이 후끈해져서 식지를 않았다.
    갱의 온돌이 너무 뜨거워 바람도 쐴 겸 나왔다.
    목도 몹시 말랐다.
    ‘물이 어디 있는 거야?’
    더듬더듬 중문을 열고 나갔다.
    주위는 고요한데 불빛이 켜진 방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 들어보니 옥린과 사내의 목소리였다.
    태웅은 묘한 호기심이 들어 뒤편으로 조용히 가보았다.
    벌어진 문틈으로 나무다리가 높은 교의(交椅)에 앉은 옥린이 보였다.
    꽃비녀를 풀고 머리를 풀어 내린 옥린은 아까와 달리 눈같이 흰 실로 짠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흰 실로 뜬 치파오로 몸에 그대로 꼭 맞았다.
    뜨개 사이로 옥린의 늘씬한 몸이 어른어른 비쳤다.
    풍만한 유방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내는 강무였다. 빳빳하고 커다란 종이 위에 숯을 들고 옥린을 그리고 있었다.

    (23화는 2021년 3월 19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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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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