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3.19 23:00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움직이지 마!"
    종이에 숯으로 선을 그어대던 강무가 소리쳤다.
    "아이 깜짝이야! 한노(漢奴)인 주제에 감히 명령을 하고 있어!"
    옥린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살짝 눈을 흘겼다.
    "뭐? 한노? 그래봤자 태평군을 무찌른 건 증국번 선생이시라고!"
    한족인 강무는 옥린이 자신을 ‘한노’라고 놀리자 발끈했다.
    만주족인 청조가 나라를 세운 뒤 한족을 무시한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지만 옥린의 놀림을 받자 기분이 상했다.
    자신을 부리기만 하지 사윗감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옥린의 아버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청조를 뒤흔든 태평군을 막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한족인 증국번(曾國藩)과 좌종당(左宗堂)이었다.
    청국의 정규군인 팔기군으로는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태평천국 교도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팔기군은 영국이 팔아넘기는 아편으로 물들고 부패해 전투력이 형편없이 떨어진 상태였다.
    청조는 태평군의 반란에 영국과 프랑스의 북경침공까지 겹치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황성(皇城)인 북경은 열하로 황급히 몽진하는 황제부터 백성들까지 피난에 나서 아우성이었다.
    영불 연합군의 무자비한 방화와 약탈이 벌어졌다.
    청조에게는 영불 연합군인 양이(洋夷)보다 태평군이 더 두려웠다.
    증국번이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인 상군을 조직하면서 전세를 돌려놓았다.
    제자인 이홍장이 역시 의용군인 회군을 조직하자 상군 정예군을 보내 힘을 보태주었다.
    태평군이 상해로 진격하자 증국번은 이홍장을 보내 서양 무기를 가진 외국인 용병부대 ‘상승군’과 함께 막아내도록 했다.
    청조가 외국부대의 힘을 빌어 태평군 진압을 원했던 것이다.
    증국번은 이런 가운데 1862년 서양식 무기생산공장을 세웠고, 이홍장도 상해에 무기를 생산하는 강남제조총국을 세워 자강운동을 벌였다.
    서양의 기술을 가져와 외세를 막고 청국의 힘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강무는 상해에서 영어를 배워 통역으로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있었다.
    총명한 강무는 프랑스말을 익히다 서양화까지 배우게 됐다.
    강무는 옥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상해로 가져가고 싶었다.
    옥린의 아름다운 모습에 발끈하던 마음이 스스르 녹았다.
    "치파오 마음에 들지? 너 주려고 일부러 최고급 프랑스 실로 짜게 한 거야. 상해에서 제일 솜씨 좋은 여자가 만들었어. 그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알면 기절할걸."
    강무는 으스대듯 말했다.
    "음 너무 딱 맞아 불편하지만 이뻐."
    옥린은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그마저도 홀딱 반해버릴 듯했다.
    "넌 몸매가 이뻐서 뭘 입어도 선녀 같아."
    강무가 입을 헤 벌리고 말했다.
    "치이- 그런데 너 정말 영국으로 갈 거야?"
    "기회가 오면 가야지."
    강무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총명한 두 눈이 반짝였다.
    "거기 여자들이 예뻐서?"
    옥린이 뾰루퉁 해져서 툭 던졌다.
    옥린은 강무를 아버지 몰래 만나고 있었는데 떠난다는 말에 우울해졌다.
    강무는 옥린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만주족은 한족과 통혼할 수 없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너보다 이쁜 여자가 어딨다고 그래?"
    강무가 옥린의 하얀 두 손을 꼬옥 쥐었다.
    "피이-."
    옥린은 강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옥린은 아버지가 강무를 집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장부로서 성공하면 너하고 혼례를 올릴 거야. 지금은 어르신이 집안의 격이 안맞다고 반대하시지만. 널 혼자 북경에 두는 게 너무 불안해. 오랑캐 놈들이 짐승 같아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어. 빨리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야지. 이홍장 선생도 희망을 걸만한 분인 거 같아. 그쪽에선 내가 영어에다 프랑스말까지 하니까 곁에 두고 싶어 하거든."
    "오랑캐 놈들정말 뻔뻔하고 야수만도 못한 놈들이야. 아편 팔아서 중국을 병들게 하구선 전쟁 배상금까지 내라고 하니."
    옥린은 울컥했다.
    세 자매가 난리통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자만 아니라면 아버지를 따라 상해에 가 무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홍장? 아버지 편지에서 이름은 들어봤어."
    "응. 증국번 선생님의 제자인데 그분도 태평군 잔당을 무찔러서 명성이 자자해. 내가 보기엔 증 선생님보다 엄청난 야심가인 거 같아."
    이홍장은 공을 세워 실력자인 서태후를 알현하기까지 했다.
    강무는 이홍장에게서 간웅의 기질을 엿본 뒤 그의 곁에 있고자 했다.
    부패할대로 부패한 청조를 망국의 위기에서 구할 영웅은 한족에게서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역시 한족이었다.
    홍수전이 비록 비적이긴 하지만 그가 내세운 멸만흥한(滅滿興漢)은 뭔가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
    옥린이 귀여운 고개를 떨구면서 뭔가 생각에 잠겼다.

    담묵같은 투명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득 자스민 향이 느껴졌다.
    옥린을 홀린 듯 쳐다보던 강무가 갑자기 숯을 내던졌다.
    "왜 그래?"
    옥린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강무는 옥린의 잘록한 허리와 긴 다리를 보자 더이상 그림 그리기가 힘들어졌다.
    "목이 말라."
    강무가 옆 탁자 위에 놓인 리쯔(荔枝)를 입에 물더니 다가왔다.
    "왜?"
    강무는 반쯤 문 리쯔를 옥린의 입에 넣어주며 입을 맞췄다.
    리쯔의 향과 과즙이 입안에 퍼졌다.
    "아이 그림 그리다 말고 이게 뭐야."
    옥린이 리쯔를 강무와 나눴다.
    강무는 옥린이 가볍게 밀치려 하자 그 손을 잡았다.
    옥린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붙들고 다른 손으로 치파오 사이로 드러난 다리를 어루만졌다.
    "너의 다리는 대단한 걸작이야."
    희고 미끈한 다리가 불빛을 받아 윤기가 흘렀다.
    "그림부터 그려 강무."
    강무의 손이 동그마한 가슴으로 올라갔다.
    "아이 참."
    강무의 손이 옥린의 치파오를 여미고 있는 매듭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단추를 하나씩 풀 때마다 쇄골이 드러나고 가슴골이 드러났다.
    강무는 마치 보석을 펼친 듯 눈이 부시게 바라보았다.
    옥린이 강무의 머리를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강무의 검정 비단 상의를 벗기자 사내의 구릿빛 등이 드러났다.
    근육으로 단단한 등과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가 차례로 드러났다.
    옥린이 거칠게 강무를 잡아 교의에 앉혔다.
    이번엔 옥린의 대리석 같은 하얀 등이 보였다.
    옥린의 희고 매끈한 두 다리가 의자 위로 드러나고 강무가 발버둥을 쳤다.
    강무는 독수리에 채인 병아리처럼 어쩔줄 몰라했다.
    달콤한 신음은 주체할 수 없는 환희의 언어였다.
    옥린의 길고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이 휘장처럼 두 사람을 가렸다.

    (24화는 2021년 3월 26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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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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