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3.26 23:00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에는 네 사람이 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대적으로 손을 본 운현궁에는 수려한 외모의 상궁과 궁녀들, 솟을대문과 담 주변을 지키는 군졸들로 왕궁을 방불케 했다.
    정원은 푸르게 뻗어 나가는 대나무와 각지에서 가져온 괴석으로 화려했다.
    방안에는 보랏빛 비단 보료가 깔리고 서안에는 벼루와 서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손님을 위한 장죽 서너 개가 매달려 있었다.
    대원군의 스승이었던 추사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고, 사방탁자에는 구름 위의 용을 그린 청화백자가 품위를 더했다.

    한 사람은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으로,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내려앉았다. 그 옆에는 영의정 김병학, 그리고 중전의 양오라버니이자 대원군의 처남인 민승호였다.
    김병학은 안동 김씨 일문이지만 대원군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이를 적극 지지해 줄곧 중책을 맡아왔다. 대원군이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김병학과 사돈을 맺겠다는 밀약을 했다는 풍문도 떠돌았다.
    "이 사람은 여주에서 온 민범호라고 합니다."
    민승호는 범호를 낯설게 보는 정원용과 김병학을 위해 소개했다. 두 사람은 비쩍 마른 민범호를 보며 중전의 집안사람이겠거니 짐작했다.
    "대감께서는 정정하시죠?"
    어색함을 깨기 위해 김병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상이 염려해주신 덕분이오. 고맙소이다."
    정원용은 목소리가 떨리고 탁음이 섞였다.
    "순원왕후 마마가 대감을 무척 아끼셨다지요?"
    한쪽에 있던 민범호가 느닷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모두 놀라 바라보았다.
    정원용은 "에헴!"하고 헛기침을 하며 듬성듬성 남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었던 순원왕후.
    정조가 아들 순조를 위해 세자빈으로 점찍었던 순원왕후는 훗날 안동 김씨 척족을 거느리고 조선의 군주로 군림했다.
    순원왕후은 왕비를 뽑는 삼간택을 앞두고 갑자기 장차 시아버지가 될 정조가 승하하면서 책봉까지 3년을 마음졸여야 했다. 그러나 일단 왕비가 된 이후에는 권세를 휘둘렀다.
    순원을 왕비로 맞은 순조는 집권 초엔 외삼촌에게 의지하더니, 이후에는 외척인 안동 김씨 세력에 크게 기울었다. 순조의 명으로 정사를 대신 맡았던 아들 효명세자(익종)가 요절하고 순조마저 승하하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전면에 나서게 됐다.
    졸지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헌종은 여덟 살이란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순원왕후는 오라버니 김유근과 남동생 김좌근을 중용하면서 김씨 가문의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나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조선의 사정은 혹독했다.
    햇볕이 적고 기후가 극도로 불순하면서 가뭄과 홍수가 나라를 강타했다.
    헌종3년 경상도에만 굶주린 자가 111만명에 달했다.
    백성들은 가뭄에 이어 홍수로 집과 논밭이 떠내려가 세금을 낼 수 없을 지경이 됐지만, 순원왕후와 김씨 척족은 지방관이 세금을 다 걷지 못하면 파직하거나 유배형을 내렸다.
    나라에서 집이 파괴된 가구에 나눠준 구휼비는 2냥에 그쳤는데, 순원왕후가 4~5년에 걸쳐 가져간 돈은 20만냥에 이르렀다.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지방관의 수탈은 기승을 부렸다.
    돈 있는 자들은 뇌물을 주고 장적에서 이름을 빼거나, 힘 있는 문중의 노비로 들어가 군역을 피했다. 환곡은 고리대금업으로 변해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댔고,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자들은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 됐다.

    "순원왕후 마마를 성모(聖母)라고 칭송하지만…."
    김병학이 민범호를 노려 보았다.
    ‘이놈이 어느 앞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고 있어! 주리를 틀 놈 같으니라고!’
    안동 김씨 일문에게 순원왕후는 대모이자 성모였다.
    "제가 알기로는 헌종대왕께서 변방의 경계를 높이려고 군량미도 늘리고 계셨지요.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민이 되자 상업으로 숨통을 트이게 해주려 했는데 일찍 돌아가셨어요. 지극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헌종은 청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에 관심이 많았지만 조정 대신 중에는 일의 중대함을 제대로 간파한 이가 없었다.
    헌종은 이양선의 공격에 대비해 군비를 비축하고 상업을 장려해 국고를 채우려 했다. 하지만 정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한 지 8년 만에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
    순원왕후가 ‘강화도령’ 이원범을 데려와 철종으로 세우고 2차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손자인 헌종의 시책을 뒤엎어 버렸다.
    김병학은 발끈해서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인가! 자네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나! 입 조심하게!"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를 사위로 둔 정원용도 민범호의 말이 괘씸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민승호가 범호의 허벅지를 콱 눌렀다.

    이때 방문이 활짝 열렸다.
    눈같이 흰 학창의를 입은 대원군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앉았다.
    몸을 꼿꼿이 세운 대원군은 수정구슬을 단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굵직한 주름살이 보기 좋게 패였다. 자신감과 생기가 가득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대원군이 비단 보료에 앉자 바람결에 신선한 난향이 감돌았다.
    "무슨 말씀들을 그리 진지하게 하고 계시었소?"
    "아닙니다 대원위 대감."
    김병학이 금세 잔뜩 찌푸렸던 표정을 환하게 바꾸었다.
    "지난번에 내주셨던 벽향주가 향이 아주 좋더이다."
    "벽향주도 좋지만 오늘은 술빛이 아롱지다 하여 백하주(白霞酒)라 불리는 술을 마십시다."
    "백하주요? 귀한 술을 내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원용도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볼이 옴폭 패이도록 웃었다.
    "영상은 몸도 편치 않으실텐데 모처럼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귀한 분들이 오셨는데 기분 좋게 취해봅시다. 밖에 누구 없느냐!"
    "예 대원위 대감!"
    "채선이를 들라 하라."
    "채선이요? 경회루 낙성연 때 소리를 한 그 채선이 말입니까?"
    제일 먼저 반색한 사람은 민승호였다.
    "그렇다네."
    대원군은 채선의 이름을 올리자 얼굴에 화색이 돌며 몸에 힘이 들어갔다.
    대원군만이 아니었다. 방에 앉은 사내들은 모두 채선의 소리와 자태를 듣고 볼 수 있다는 말에 입이 확 벌어졌다.

    진채선.
    대원군은 경복궁 재건을 축하하는 연회를 대대적으로 준비하면서 전국의 최고 명창들을 불러모았다.
    검푸른 물 위로 경회루의 건강하면서도 고혹적인 자태가 흔들리는 가운데 채선의 소리는 궁궐을 압도했다. 미성인데다 성량이 풍부해 청중을 사로잡았다.
    오장육부에서 끌어내는 소리는 하늘에 닿고 사람들의 심금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었다.
    당시 채선은 남장을 하고 무대에 올랐으나 미모를 갖춘 여자로 밝혀져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이전까지 소리하는 광대는 오로지 사내들뿐이었고, 채선이 그 금기를 깬 것이었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대원군은 결국 채선을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
    "대원위 대감, 채선이 대령하였사옵니다."
    문이 열리고 진달래 빛 저고리에 노랑 치마를 풍성하게 입은 계집이 들어왔다.

    (25화는 2021년 4월 2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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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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