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4.02 23:00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채선이라 하옵니다."
    채선이 대원군과 정원용 앞에서 절을 올렸다.
    ‘캬아 듣던대로 곱구나!’
    김병학은 군침을 삼키며 일어서는 채선을 올려보았다.
    경회루 연회에선 다소 가무잡잡하던 채선이 운현궁으로 옮겨온 후론 백옥같은 피부로 바뀌었다. 대원군이 보물처럼 아껴 바깥출입을 금했기 때문일까. 짙은 눈매와 굵직한 이목구비, 최고 명창이라는 사실이 사내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어험."
    대원군은 보물을 내놓은 듯 헛기침을 하며 목을 빼 들었다.
    대원군은 채선을 보자 머리를 짓누르던 근심이 사라지고 온몸에 뜨거운 피가 흘러 들뜨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니 채선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채선은 민낯일 때는 순진한 시골 아이 같은데 비단을 입히고 분칠을 해놓으면 딴판으로 변했다. 민들레처럼 보이던 아이가 검붉은 모란이 되어버렸다.
    ‘술자리가 끝나면 채선이를 남겨둬야겠어.’
    민승호는 두 손바닥에 땀이 나 저도 모르게 비볐다. 운현궁을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채선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저 몸에서 사내 명창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소리를 내다니! 저 입술에 입 한번 맞춰봤으면.’

    대원군이 총애하는 또 다른 이유는 채선을 볼 때마다 경복궁 중창을 완성한 대업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폐허가 되어 버린 경복궁이었다. 잡풀이 무성한 경복궁 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시리고 화가 치밀었던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270년 만에 경복궁을 세운 것에 무한한 자부심과 감격을 느꼈다.
    장엄한 위용을 갖춘 경복궁이 완성되자 한양의 모습이 달라졌다.
    푸른 하늘 아래 여유롭게 엎드린 청룡처럼 백악산이 뒤를 두르고 그 아래로 겹겹이 보이는 경복궁의 전각들은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냈다.
    왕궁의 장엄한 의식이 거행되는 근정전은 장중하면서도 절제된 화려함을 갖췄고, 왕과 신하가 국정을 의논하는 사정전은 두 마리 거대한 용이 날아오르는 그림이 있어 웅혼하면서도 세련된 자태를 보였다. 하늘을 향해 경쾌하게 올라간 추녀의 곡선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태연하고 그윽했다. 물의 기운으로 생명력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경회루는 경복궁의 여의주였다.

    경복궁의 완성은 대원군의 정권 장악을 굳건히 해주었다. 그전까지는 신정왕후(조대비)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애간장을 졸여야 했다.

    신정왕후(효명세자의 비)는 아들인 헌종이 졸지에 숨을 거두고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강화도령 철종을 왕위에 앉히자 경악했다. 철종을 세운 순원왕후는 2차 수렴청정에 나섰고, 이때 신정왕후에게 나타난 사람이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마마 문안 인사 올리옵니다."
    신정왕후는 처음 흥선군 이하응을 보고 놀랐다. 세도가를 돌며 술이나 얻어먹는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당당하고 박력 있는 모습이었다. 아직 왕가의 기품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흥선군은 가끔 조대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면서 시정의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줬고 슬쩍 둘째 아들 이야기를 했다.
    "제 둘째 녀석이 꽤 똘똘합니다."
    만약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간다면 다음 왕위 계승자를 지명할 사람은 신정왕후였다. 흥선군은 신정왕후가 아끼는 조카 조성하의 환심을 사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흥선군의 제2자 명복이 익종(효명세자)의 대통을 잇게 하라!"
    철종이 승하하자 신정왕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때부터 흥선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안동 김씨들을 상대해야 했다. 촉망받는 자질로 왕위 계승자로 꼽히던 이하전을 역모로 엮어 고통스럽게 죽게 만든 자들이었다.
    대원군은 수렴청정에 나선 신정왕후와 손을 굳게 잡았다.
    의정부를 바로 세우기 시작했다. 전란에 비상체제로 운영되던 비변사를 안동 김씨들이 틀어쥐고 의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것이다.
    비변사에서는 상피제도가 없어 아버지와 아들이 당상으로 함께 있어도 문제 되지 않았다. 비변사를 통해 지방 관직 임명권을 쥐면서 매관매직이 이뤄졌다.
    대원군은 의정부로 권력을 옮기며 비변사의 힘을 빼갔다.

    수렴청정에 나선 신정왕후는 만동묘 철폐를 전격 선언했다.
    서원은 중앙의 권력자들이 지방의 유력자와 결탁해 횡포를 부리던 본거지였고 그 중심에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있었다. 명나라 황제를 제사하는 만동묘와 화양서원은 노론 세력의 근거지였다. 이들은 제사를 올려야 한다며 백성들에게 비용을 강제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휘둘러 원성이 높았다. 중앙의 고관들이 각 서원의 원장을 맡은 경우가 많아 폐해가 심했다.
    유림들은 만동묘를 철폐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발칵 들고 일어났다.

    며칠 뒤 신정왕후의 새로운 명이 떨어졌다.
    경복궁을 중건하라는 명이었다.
    안동 김씨와 노론의 중핵이던 김좌근이 "300년 동안이나 손대지 못한 일인데 다시 지어 놓는다면 누군들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공사가 더없이 크고 재력도 갑자기 마련할 수 없어 답답합니다"라며 반대했지만 이미 대원군의 입김을 받은 중신들은 찬성 쪽으로 손을 들었다.
    대원군은 만동묘 철폐에 반발하던 대신들을 경복궁 공사로 몰아넣으면서 힘을 분산시켰던 것이다.
    신정왕후는 "이처럼 중대한 일은 나의 정력으로는 모자란다. 모두 대원군에게 맡겨버렸으니 매사를 꼭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했다.
    대원군을 경복궁 총책임자로 공개 지명하면서 정국을 번개같이 찢어놓았다.

    경복궁 사업이 시작되자 전국 각지에서 나무와 돌들이 수레에 실려 왔다.
    승려가 동원되고 전국의 장인들이 속속 올라왔다.
    우선 한양과 인근 지역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했고 먼 곳에서 온 인부들이 머물 임시 초막이 세워졌다.
    그러나 급기야 ‘경복궁 타령’이라는 노래가 돌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경복궁을 지어 못 살겠다는 백성들의 노래였다. 이런 불순한 노래가 돈다는 것은 정권을 쥔 자에게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그럼 소녀 ‘경복궁 타령’을 올리겠습니다."
    "지금 뭐라 했느냐! 발칙한 것 같으니라고!"
    탕!
    대원군은 주먹으로 교자상을 내려쳤다. 백하주가 든 술병이 넘어지면서 정원용의 옷 위로 술이 콸콸 쏟아졌다.
    "아이쿠!"
    "대감 괜찮으십니까?"
    채선이 급히 술병을 바로 잡고 어쩔줄 몰라 하고, 김병학과 민승호가 정원용의 젖은 옷을 민망해하며 하인을 불러댔다. 민범호만이 뭣이 재밌는지 히죽거렸다.
    "어허 무슨 일이십니까 대원위 대감."
    정원용은 억지로 쓴웃음을 지으며 대원군을 바라보았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이다. ‘경복궁 타령’을 한다는 말에 그만."
    대원군이 채선을 노려보았다.
    "소녀 ‘방아타령’을 올린다고 여쭈었는데요!"
    채선이 대원군을 민망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26화는 2021년 4월 7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