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4.09 23:00

    [그림자 황후]

    1부 (26)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물럿거라! 대원위대감 행차시다!"
    사람들은 네 명의 건장한 장정이 짊어진 가마가 나타나자 허겁지겁 달아나며 길을 비켰다.
    흥선대원군의 떠들썩한 가마였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단단한 가마꾼만 아니라 눈을 부릅뜬 겸종들도 주위에서 가마를 호종했다. 칼을 차거나 몽둥이를 든 자들로, 눈을 부라리며 쉴새 없이 두리번거렸다.
    가마를 배종한 자들 중에는 ‘천하장안’도 끼어 있었다. 네 명의 대원군 심복인 ‘천하장안’은 여론을 탐지해 보고하고 불순한 자들은 무섭게 응징했다.
    ‘천하장안’의 동생들은 궁녀들이었고, 이들과 함께 몇 명의 내시들이 대원군의 왕궁 안 눈과 귀가 되었다.

    대원군은 기린을 수놓은 남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눈빛은 차고 낮게 깔렸다.
    가마는 날 듯이 종친부로 향했다.
    경복궁에 닿자 대원군은 잠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태조 때보다 몇 배 더 웅장하게 지은 경복궁이 백악산과 웅혼함을 겨루고 있었다. 270년 만에 경복궁을 세운 대원군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듯했다.
    새로 단장한 종친부는 근엄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로 주인을 맞았다.
    왕족과 종친의 일을 맡아온 종친부는 안동 김문의 세도 정치를 거치면서 빈껍데기로 남아있었다. 꺼져가던 종친부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대원군이었다.

    종친부로 들어서자 형조 집리(執吏)인 오도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납시옵소서 대원위 대감!"
    오도영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을 바짝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원군은 오도영처럼 6조의 집리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집리들이야말로 6부의 실무를 뼛속까지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6조의 수장인 판서와 참판, 참의 등이 무얼 하고 있는지 무슨 꿍꿍이인지 대원군에게 빠짐없이 보고했다.
    "들어오너라."
    대원군은 종친부 안에 마련한 집무실 아재당(我在堂)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다 쓰러져가던 종친부를 기억하고 있는 오도영은 몰라보게 달라진 종친부를 보자 새삼 머리가 쭈뼛했다. 대원군의 힘을 눈으로 확인하자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대원군이 안동 김문이 쥐고 있던 비변사의 힘을 빼 의정부로 옮겼지만, 그 힘의 최종 목적지는 종친부였다.
    원래 종친은 국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왕의 살아있는 아버지로서 정무에 관여하기 위해 종친부를 키웠다. 종친들이 조정에서 실제 관직을 겸직할 수 있게 하고, 주로 핵심인 재정과 군정 부분에 배치했다.
    종친부는 조정의 최고 기관이 되었고 대원군은 종친부의 수장으로서 명을 내렸다.
    실질적으로 왕위에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종친부를 통해 ‘대원위분부’라는 명령을 지방까지 내려보냈다.

    왕의 전교보다 ‘대원위분부’라는 다섯 글자에 나라가 떨었다.

    대원군은 또 전라감영의 백낙서 같은 향리들을 손아귀에 넣어 그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지방관을 좌지우지했다.

    "대원위 대감께서 패악의 뿌리였던 서원을 없애라 분부하시니 백성들이 기뻐 춤을 추고 있습니다요."
    오도영은 대원군의 벨 것 같이 날카로운 눈을 보자 거위처럼 쭉 뺀 머리를 수그렸다.
    "유생들은 광분해서 날뛰고 있지 않느냐."
    대원군의 입술이 비틀리듯 벌어졌으나 눈은 노기를 머금었다.
    상소를 올리며 울부짖는 유생들을 죄다 끌어내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봤자 한 때뿐입죠 헤헤. 대감께서 반호(班戶)들도 군포를 내게 하시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합니다요.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당최 누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요."
    "저희들 체면 세워주려고 종놈의 이름으로 내게 했으니 더이상 군말하면 엄벌을 내려야지."
    "암요 여부가 있습니까요! 참으로 제갈량의 술책이십니다!"
    "달리 또 할 말이 있느냐?"
    "근데 말입니다 대원위 대감…."


    바람이 분다.
    밝은 태양 아래 푸른 보리가 바람을 타고 쓰러질 듯 흔들린다.
    파아란 하늘이 금세라도 툭 터져 쏟아질 듯하다.
    흰 구름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다.
    보리밭에 누워 바람을 느끼고 흘러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
    어디선가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누굴까.
    ‘아버지-.’
    아 둘째 놈 명복이구나.
    익선관에 붉은 곤룡포를 입은 소년은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 유모를 살려주십시오.’
    ‘그만 하십시오 주상!’
    ‘아버지 유모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저입니다.’
    ‘그만 하라니까!’
    ‘대원군-!’
    갑자기 소년은 굵은 목소리로 ‘아버지’ 대신 ‘대원군’이라 내질렀다.
    대원군이 눈을 번쩍 뜨자 어느 틈에 비단 이불이 목을 감고 있었다. 몸부림을 치다 감았나보다.
    흘린 땀으로 이불이 푹 젖어 있었다.
    ‘꿈이었구나.’
    대접에 담긴 찬물을 들이킨 대원군은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운현궁 주위로 군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을텐데도 불안했다.
    꿈속이지만 명복이 자신에게 눈을 부릅뜬 것은 처음이었다. 등짝이 서늘했다.

    꿈속에서 왕은 자신을 키워준 유모 박씨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씨는 천주교를 믿어 ‘박마르다’라는 영세명까지 얻었다.
    사실 대원군은 아내인 부대부인과 유모가 은밀히 천주교를 믿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척 했다.
    부대부인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축하하는 미사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대원군은 승지였던 남종삼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프랑스의 힘을 이용하자고 했을 때 솔깃해 베르뇌 주교와의 접촉을 지시했다. 러시아는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 땅에 막무가내로 들어와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경으로 간 사신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북경 침공과 선교사들의 피살 소식을 전했다. 서양 오랑캐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데다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가자 대원군의 마음이 바뀌었다.

    대원군은 조정 대신들이 천주교를 비난하고 경복궁 대역사로 민심이 돌아서자 돌파구가 필요했다. 백성들에게 원납전을 강제로 거두자 원성이 높아지고 관직까지 팔면서 양반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상평통보의 100배라는 당백전을 통용시켰는데 실제 가치는 엽전의 5~6배 정도에 그쳤다. 당백전은 당시 조선에서 유통되던 돈보다 많은 1600만 냥이나 만들었고, 급기야 청나라 돈인 청전까지 유통시키자 쌀값이 폭등했다.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다.
    천주교인으로 붙잡으면 그 재산을 몰수할 수도 있었다.
    포도청은 두루마기를 입고 조선인처럼 암약하던 베르뇌 주교를 체포했다. 왕의 유모인 박마르다는 강원도로 피신했지만 끝내 잡혀 순교했다.
    박해를 피해 달아났던 프랑스 선교사 리델은 함대사령관 로즈와 프랑스 군함 7척을 몰고 와 강화도를 약탈 방화했다. 조선인 천주교인의 안내를 받고 진입한 로즈는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죽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며 날뛰었다. 조선군은 연패를 거듭하다 양헌수의 분전에 힘입어 프랑스 함대를 물러가게 했다.
    대원군은 위정척사비를 곳곳에 세우고 ‘위정척사 먹’까지 만들어 글씨를 쓸 때마다 보게 했다.

    (27화는 2021년 4월 14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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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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