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4.23 23:00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아까 아이가 와서 산 절에 다녀가라고 하더라."
    초계는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님은 한양 가신 뒤 산 절에 안 다니시는데.
    산에는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가 몸을 흔들고, 꽃잎을 활짝 연 복사꽃이 보는 이를 취하게 했다. 가득 내리는 태양 빛에 눈이 부시고 꽃들의 색과 향을 탐하는 벌과 나비가 이리저리 날았다. 새로 틔우는 나무의 연녹색이 이리저리 산을 물들이며 싱그러움을 더했다. 바위 위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맑고 기운찼다. 가슴이 터질듯한 봄이었다.
    절에는 주지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온 김에 산신각이나 올라가 볼까.
    초계는 산신각에서 두 손을 모으고 절을 올렸다.
    이때 누군가 초계의 어깨를 꽉 잡았다.
    "어머나!"
    "쉿!"
    사내가 재빨리 삿갓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
    하얀 두루마기를 점잖게 입은 사내는 달수였다.


    초계는 달수의 손에 이끌려 숲속으로 들어갔다.
    달수는 쉴 새 없이 사방을 경계하며 초계를 쳐다보았다. 기쁨과 반가움이 역력했다.
    상투에 망건까지 쓴 달수는 갓만 썼다면 영락없는 양반이었다.
    다듬은듯한 눈썹과 오똑하고 긴 콧대, 얇지만 커다란 입술은 초계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차려입으니 대궐을 출입하는 잘생긴 젊은 사대부였다.
    "이…건 뭐야? 이 옷은 다 뭐고. 경을 칠려고 이러구 나타났어!"
    "초계야! 여기 오래 있지 못해. 오늘 떠나야 해."
    "그러게 왜 왔어?"
    초계는 뾰로통해져서 물었다. 달수와 헤어지고 나면 또 한참을 괴로워해야 했다.
    "초계야 나랑 같이 가자."
    "뭐?"
    초계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제는 니가 노비라도 상관없다."
    쏴아-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나무잎을 세차게 흔들어댔다.
    바람 소리는 달수의 말소리까지 삼켜버렸다.
    "아니 손톱 발톱에 피가 나도록 일해서 속량해줄텨. 같이 가자."
    "싫어!"
    초계는 몸을 홱 돌렸다.
    ‘왜 이제 나타났어! 조금만 조금만 더 일찍 오지!’
    초계의 가슴이 죽죽 찢어졌다. 자신은 중전마마와 이미 약속한 몸이었다.
    "그러지 말고 제발 같이 가자. 다른 계집은 다 싫다. 자나 깨나 너만 생각난다구."
    달수가 초계의 손을 덥썩 쥐었다.
    ‘아!’
    순간 초계는 아득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엉엉 울던 자신을 달래주던 달수의 그 따스한 손이었다.
    달수가 와락 초계를 안았다.
    짧은 저고리 아래로 느껴지는 초계의 둥근 유방이 달수를 뜨겁게 했다.
    "저리 가! 뭔 짓이야!"
    환하던 주위가 구름이 몰려오는지 눅눅해졌다.
    "나 마지막으로 매달리는 것이여. 이젠 다신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달수가 털썩 주저앉았다.
    초계는 달수의 굵고 죽 뻗은 목선과 깎은 듯한 턱선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내의 찌푸린 미간마저 깎은 옥 같아 보였다.
    ‘너무 늦었다 달수야.’
    초계는 비척거리며 돌아섰다.
    산벚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렸다.


    강을 내려다보는 정자는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사내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민승호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마련한 술자리였다.
    부름을 받고 온 초계는 표정이 없고 얼굴색은 백지처럼 창백했다. 남색 치마에 진노랑 저고리를 입은 초계는 금세 달에서 내려온 듯했다.
    "소문 난 아이가 저 아이군요 하하. 소문날만 합니다."
    태웅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네 소리 한번 들어보자."
    민승호가 으쓱해져 초계에게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쇤네 오늘 몸이 불편하여…."
    "알았다 알았어 헤헴."
    "쯧쯧 거참 아쉽네. 대감 그럼 전 이만 일어설까 합니다."
    여주 목사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했다.
    "왜 그러시오? 아직 술자리는 시작도 안 했는데."
    "요사이 동비(東匪, 동학교도)들이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글쎄 사람들 눈을 속이기 위해 아랫것들이 양반행세까지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혹여 모르니 저는 가서 교졸(校卒)들이나 쪼아야 하겠습니다."
    ‘양반 행세하는 동비?’
    초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달수가 그럼 동비란 말인가.
    "잠시만요 나으리!"
    초계가 벌떡 일어섰다.
    초계가 잠시 달을 처연히 바라본 뒤 여주 목사를 향해 웃었다.
    "예까지 납시었는데 어찌 그냥 가시려고요. 쇤네 재주가 미천하오나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초계가 목사를 두 눈에 넣을 듯 화사하게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옷고름을 살짝 쥐었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가냘픈 몸을 배반하듯 강물을 흔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는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자태는 꽃 속의 꿀처럼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태웅은 주위의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지고 오로지 초계만이 보였다.


    왕비는 자경전에서 신정왕후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주상이 요즘 <통감>을 진강하신다지요? 어찌나 진지하게 성학에 임하시는지 기쁩니다."
    신정왕후는 잠시 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를 떠올렸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제 주상도 성년이 됐고 친정을 하실 때가 됐어요."
    신정왕후의 눈에 노여움이 설핏 지나갔다. 대원군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황제가 친정에 나설 것이라 하니 전하께서도 생각하시는 바가 있는 듯 하옵니다."
    신정왕후가 상궁들과 나인들을 물리쳤다.
    "그러셨소?"
    "예 하오나 지금 상황이…."
    신정왕후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왕과 왕비를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주상은 익종대왕(신정왕후의 부왕)의 승통을 잇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대원군과 맞설 경우 효를 거스른다는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명분이었다.
    충과 효는 목을 겨누는 가장 무서운 칼이었다.


    왕은 진강을 마치자 상궁의 인도를 받아 향원정으로 향했다.
    "중전 무슨 일로 이리로 불렀소?"
    "날이 너무 좋아 꽃 구경 하시라고요 전하."
    궁궐 곳곳에는 대원군이 심어놓은 눈과 귀가 많았다.
    "자전(慈殿·신정왕후)께서 이젠 전하가 친정을 하실 때가 되었다고 하셨사옵니다!"
    "중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하 이제 모든 허물은 신이 받을 것이옵니다!"

    (29화는 2021년 4월 30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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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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