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5.14 23:00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휘리릭-
    짙게 화장한 재인(才人)들이 땅에 박은 기둥 주변으로 빨강과 노랑, 파랑 비단을 둘러치면서 대형 무대가 가설됐다. 비단 장막으로 둘러쳐 만든 거대한 채붕(彩棚)이었다. 비단에 수놓은 봉황과 용은 무대를 입에 물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팔관회가 벌어지는 채붕에는 고려 왕족과 개경 귀족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각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비단을 통해 햇살이 쏟아지자 오색구름 위에 있는 듯했다.
    둥둥둥-
    말에 올라탄 귀공자와 궁궐을 지키는 정예병들이 격구를 시작했다. 말과 하나가 된 사내들의 몸이 활처럼 꺾이고 순식간에 날았다. 귀공자들은 비단 철릭을 펄럭이며 뿌연 먼지 속에서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를 드러냈다. 함성과 휘파람, 박수 소리가 뒤엉켰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자 장중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곳곳에 횃불이 켜지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화랑이다!"
    비단옷으로 차려입은 화랑 수 백 명이 뛰어나와 주위를 에워쌌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4명의 미소년들이 가운데로 나왔다. 꿩 깃을 달고 흰 비단옷에 검은 비단 띠를 두른 소년들은 군무를 추기 시작했다. 박력 넘치면서도 우아하고, 칼같이 절도가 있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깊은 산과 맑은 강을 찾아다니며 하늘에 제를 올리고 무예를 닦는 선랑(仙郞)들로, 하늘의 기운과 감응하는 신군(神軍)들이었다.
    하늘을 향해 바치는 선무(仙舞)를 추자 성스러운 기운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중 한 명이 단 위로 올라가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얼굴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
    자세히 보니 너무나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짐은 그대를 국선(國仙)으로 삼겠다. 민적이 나라의 국선임을 명하노라!"
    와-
    땅과 하늘을 울리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온몸에 힘을 주던 왕비가 눈을 뜨자 창밖이 환했다.
    새벽까지 읽은 상소문이 서안에 쌓여있었다.
    ‘꿈이었구나.’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인데 몇 년 만에 다시 본 것이다.
    이번엔 국선의 이름을 또렷이 들었다. 국선의 이름이 민적이라.


    "오라버니 혹시 우리 가문에 민적이란 분이 계신가요?"
    왕비는 궁에 입시한 민규호에게 물었다. 왕비는 민승호가 폭사한 이후 사촌 오라버니인 민규호를 불렀다.
    "중전마마께서 어찌 그분을 아시옵니까! 충렬왕이 국선에 명한 분으로 민적(閔頔)이란 분이 계셨사옵니다."
    "국선이요!"
    왕비는 무언가에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얗게됐다.
    "예 중전마마. 고려에도 선랑들이 있었고 그 중 으뜸인 자를 국선으로 삼았사옵니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워낙 출중하셨나 보옵니다. 열 살 때 산에 가서 글과 도를 닦았다고 하옵니다. 대사헌과 나주목사를 거치셨사옵니다."
    ‘가만있자! 꿈속에서 본 얼굴이…!’
    왕비의 눈이 광채를 띠었다.


    "태웅이라 하였지?"
    "예 중전마마."
    세자를 낳은 후 자신감이 오른 왕비의 자태는 더욱 아름다웠다.
    "연경하고 상해에 있었다고? 상해에 있었다면 이홍장에 대해서도 아느냐?"
    "예. 양이들을 모방해서 무기제조창도 만들고 서양 책도 많이 찍어내고 있습니다. 청국인들은 그런 일들을 자강(自强)이라고 하옵니다."
    "한어는 잘하겠고, 서양말은 좀 하느냐?"
    "예 중전마마 영국말을 좀 배웠사옵니다."
    "잘했구나. 앞으로 서양 책도 번역하고 할 일이 많다. 과거도 준비하거라."
    왕비는 초계에게 얼굴을 돌렸다.
    "니가 왜어(倭語)를 했으니 왜관에 가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오너라."
    청국은 일본이 서양과 내통하기 시작했으니 조심하라는 자문을 보냈다. 왜인들이 얼마 전부터 외교 문서인 서계(書契)를 접수하라며 자꾸 성가시게 굴어 꿍꿍이속이 궁금했다. 일본 왕이 다시 국정에 나섰다느니 서양 오랑캐처럼 강한 무기를 가졌다느니 하는 말이 들려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직도 대원군 파들이 일본과의 통로인 왜관을 잡고 있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왜인들은 극악 무도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자들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예? 마마 왜관은 여자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옵니다."
    "새를 잡는데 돌만 던질 것이냐? 안되면 치마라도 벗어서 잡아야지. 태웅이와 같이 가거라. 은자는 두둑이 줄 테니 부족함 없이 쓰고."


    "그만 출발하십시다."
    걸걸한 목소리가 태웅을 불렀다.
    초계를 기다리던 태웅은 깜짝 놀랐다. 연옥색 도포를 입고 커다란 갓을 쓰고 나타났던 것이다.
    "아니 이건 무슨 꼴이요?"
    "쉿! 내 얼마간 사내가 되기로 했소이다."
    목소리가 걸걸해서인지 그렇게 꾸며서인지 이쁘장한 양반댁 도련님 같았다.
    오 역관의 소개로 두 사람은 왜관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조선어 유학을 온 왜인과 만나 일본 문물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는 구실이었다.
    왜관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다다미 쪽을 파는 가게가 보였다.
    왜관은 남자들만 머무는 곳이라 불미스런 일이 많았다.

    초계와 태웅이 소개받은 일본인은 나가노 교타로였다.
    일본 무사들이 차려입을 때 걸치는 하오리를 입은 중키의 사나이였다.
    "조선 명주인 죽력고를 선물로 가져왔으니 받아주십시오."
    초계가 말에 싣고 온 호남 명주 죽력고를 내놓았다.
    "아! 고맙습니다!"
    술을 보자 나가노의 딱딱함이 조금 풀렸다.
    "쓰시마에서 오셨습니까?"
    초계가 먼저 묻기 시작했다. 왜관에 유학 오는 자들은 주로 쓰시마에서 오기 때문이었다.
    "전 아닙니다. 이토 히로부미 상이 적극 권해서 오게 됐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상이요? 누구입니까?"
    태웅은 한쪽 도코노마에 올려진 화병을 바라보다 되물었다.
    "네 본국이 부흥하는 시기를 맞아 대활약을 펼치고 있는 분입니다. 사실 저는 이토 상의 가장 막역한 친구인 이노우에 상과 더 가까운 사이입니다. 이토 상은 조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미닫이문인 아카리쇼지가 열리고 상이 들어왔다. 커다란 삼나무로 통에 대구와 곤약, 숙주 같은 야채를 넣고 끓였다.
    초계가 연거푸 술을 권하자 나가노는 웃음이 헤퍼지고 거침없이 말했다. 나가노는 술을 따르는 초계의 손을 잡고선 놓지 않았다.
    ‘저 자식이!’
    태웅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걸 꾸욱 참았다.
    "오 술 대단히 좋군요. 사케는 화려한 듯하지만 경쾌함 속에 비수를 품은 것 같거든. 조선 명주들은 거칠지만 사내의 욕정을 뒤흔드는 뭔가가 있어요 하하하."
    나가노가 초계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2부 2화는 2021년 5월 21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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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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