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코인’ 편승한 그래픽카드, 물량 넘쳐도 싯가

입력 2021.05.27 06:00

조립PC 시장이 고사 위기다. 암호화폐 채굴 열풍이 큰 영향을 미친다. 채굴 수요로 그래픽카드 가격이 2~3배로 급등했다. 조립PC의 가격도 덩달아 올랐다. 구매 부담을 느낀 일반 소비자들이 조립PC 구매를 포기하는 분위기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래픽카드 물량이 넘치는데도 가격은 여전히 싯가라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 조립PC 매장을 둘러보면 초창기엔 없어서 못 샀던 최신 그래픽카드가 넉넉히 쌓여있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순식간에 동나기 일쑤였던 온라인 쇼핑몰의 그래픽카드 재고도 넉넉하게 남아있다. 없어서 못사는 것이 아닌, 비싸서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픽카드 가격을 통제해야 할 제조사·유통사들도 아예 손을 놓은 모양새다. 처음에는 한정 수량 특가판매, 추첨 판매 등을 통해 시장 안정화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은 그래픽카드 가격이 최대 3배까지 치솟자 오히려 ‘코인 열풍’을 방조하고, 그에 편승하는 모양새다. 그래픽카드 물량을 일반 소매점에 풀면서 ‘시가’대로 판매하는데 딱히 제재를 가하지 않는 상황이다.

때문에 그래픽카드 물량이 있어도 조립PC 시장의 분위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150만원 안팎이면 남부럽지 않은 고성능 PC를 넉넉히 꾸밀 수 있었던 작년 이맘때와 달리, 현재 150만원으로는 하이엔드는커녕, 메인스트림 급 그래픽카드 하나만 겨우 살 수 있다. ‘가성비’가 가장 좋은 조립PC 구성이 200만원을 훌쩍 넘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조립PC 업체들도 어떻게든 PC를 팔기 위해 안간힘이다. 그래픽카드를 단품으로 구매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시가’로 팔지만, 다른 부품과 세트로 구매하거나 CPU나 메인보드, 파워, 케이스 등을 포함한 ‘조립 완제품’으로 구매하면 좀 더 저렴하게 판매하는 식이다. 그래픽카드 때문에 오른 가격을 다른 부품으로 억지로 맞추다 보니, 마진도 거의 남기지 못한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결국 소비자들은 가격 변동이 반영되지 않아 오히려 가성비가 좋아진 삼성, LG, HP, 델, 레노버 등 대기업 완제품 PC 구매로 돌아서거나, 마찬가지로 채굴 열풍의 영향이 적은 최신 고성능 노트북으로 돌아서는 중이다. 게이밍 PC를 찾던 게이머들도 슬슬 플레이스테이션, 엑스박스 같은 게임 콘솔을 기웃거린다.

특히 그래픽카드의 핵심 부품인 GPU를 공급하는 엔비디아의 행보는 그래픽카드 제조·유통사들의 현재 행보가 뭔가 이상하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엔비디아는 채굴 열풍으로 세계 그래픽카드 가격이 폭등함에도 불구하고, GPU 및 자신들이 직접 제조해 판매하는 한정판 그래픽카드 ‘파운더스 에디션(FE)’ 제품의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실제로, 최근 국내에 꽤 많은 물량이 풀리고 있는 지포스 30시리즈 FE 제품군의 가격은 ‘지포스 RTX 3080 FE’ 기준으로 초기 출시 가격과 같은 99만원대에 판매 중이다. 동일한 GPU를 탑재한 일반 제조사의 제품이 5월 현재 시가 기준 280만~300만원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비정상적(?)인 가격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엔비디아는 멀쩡한 일반 그래픽카드가 채굴 시장으로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채굴 전용 GPU인 ‘CMP(Cryptocurrency Mining Processor)’ 시리즈, 기존 GPU에서 채굴 성능을 강제로 낮춘 ‘LHR(Lite Hash Rate)’ 시리즈를 잇달아 선보였다. 그래픽카드 가격 상승의 최대 원인인 채굴업계의 시선을 채굴 전용 제품으로 돌림으로써 일반 그래픽카드 시장 정상화를 노리는 모양새다.

엔비디아가 이런 통제된 행보를 보이는 것은 과거 채굴 열풍에 잠시 편승했다가 과도한 재고로 엄청난 손해를 입었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암호화폐 광풍이 당장은 이익이 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손해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몸소 깨우친 상태다.

반면, 엔비다에게 GPU를 받아 그래픽카드를 만드는 제조사 및 유통사들은 그래픽카드 가격 정상화에 미온적이다. 오히려 채굴 성능이 떨어져 비싸게 팔 이유가 없는 ‘LHR’ 모델마저 일반 제품과 똑같은 ‘시가’에 판매하고 있다. 채굴 열풍에 편승해 하나라도 더 비싼 가격에 팔려는 근시안적인 행보다.

채굴 성능이 안나오는 LHR 제품을 일반 모델과 같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 쇼핑몰 갈무리
이미 중국과 미국 등을 시작으로, 글로벌 암호화폐 및 채굴 시장에 대해 단속과 제재, 통제는 더욱 강화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중국은 정부에서 앞장서서 자국 내 암호화폐 관련 시장의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중국의 대규모 채굴 전문업체들이 현지 사업에서 하나둘씩 발을 빼기 시작했다.

고성능 GPU 시장의 과반수 이상 점유율을 차지하는 엔비디아도 채굴이 잘 되는 제품은 슬슬 단종시키고, 앞으로 채굴이 잘 안 되는 그래픽카드만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채굴용 대체품인 CMP 제품을 대안으로 선보인 상태다. 그만큼 채굴 시장의 기상도에 슬슬 먹구름이 끼면서 그래픽카드 가격도 슬슬 내려가야 정상인 상황이다.

그래픽카드 업계는 이제 당장의 이익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 시장 안정화에 눈을 돌려야 한다. PC를 팔지 못하는 소상인 중심의 조립PC 업계는 이미 고사 직전이다. 소비자들도 비싼 그래픽카드 때문에 이전처럼 조립PC에만 매달리지 않고 있다.

이미 애플의 신형 맥(Mac)이나, 최신 게임 콘솔처럼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도 많다. 조립PC 시장이 완전히 몰락하고, 남은 소비자들도 모두 떠난 이후에야 그래픽카드 가격이 정상화되어도 남는 것은 전체 시장 규모에서 한줌도 안되는 소수의 마니아뿐이다. 결국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이 스스로의 판로를 닫아버리는 자충수가 되는 셈이다.

더 늦기 전에 조립PC 시장을 살리고, 떠나가는 소비자들을 붙잡으려면 달콤한 당장의 이익보다, 아직까지 그래픽카드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중인 소비자들의 아우성에 귀를 귀울일 때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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