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5.28 23:00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나가노 교타로가 나가자마자 초계는 천을 동여맨 손가락으로 붓을 잡았다.
    방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두루마리에 적어야 했다.
    "그 손으로 뭘 한다고. 이리 내요."
    태웅이 초계의 허리를 잡아 옆으로 밀쳐내고 붓을 빼앗았다.
    허리를 잡힌 초계가 꿈적 놀랐다.
    "자- 일을 하려면 술이 있어야지."
    태웅은 술을 병째 빨며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붓이 어찌나 빠른지 검은 말 한 마리가 달리는 듯했다.
    바닥에 두루마리를 펼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계는 속도도 속도지만 들은 바를 빠짐없이 적는 기민함에 혀를 내둘렀다.
    "다 됐다!"
    태웅이 옮겨적기를 마쳤을 때 초계는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태웅은 허망하게 바라보다 하는 수 없이 눕혀 주었다.
    ‘상해에선 옥기와 옥린이까지 달려들었는데. 참! 휘향이도 날 얼마나 좋아하던가.’
    남장을 한 초계가 가슴을 꽁꽁 처매고 있어서인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태웅이 초계의 옥색 도포를 열고 가슴을 풀어주었다. 초계의 얼굴이 옥을 깎아놓은 듯 기가 막혔다. 취기가 올라 발그스레해 한떨기 장미 같았다. 얼음과 엷은 비단에 싸인 듯 신비롭고 그윽했다. 만져보고 싶었다.
    연꽃 봉오리가 벌어지듯 초계의 가슴이 풍만하게 부풀어 올랐다.
    "에잇!"
    태웅이 그 모습을 쳐다보다 등불을 훅 끄고 벌렁 누웠다.
    태웅에게 ‘배 띄워라’를 부르던 초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둠 속에서 초계가 조용히 눈을 떴다.
    ‘흥! 어린 것이 밝히긴!’
    그러나 말을 기가 막히게 탄다는 태웅의 단단한 허벅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왕비는 왜관에 다녀온 태웅의 글을 읽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국이 비밀 자문(咨文)을 보내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고 있으며 법국(프랑스)도 가세할 기미가 있다고 전했다. 조정의 중요 사안은 왕비에게 낱낱이 보고되었다. 왜놈들의 움직임이 몹시 불길했다.
    "연경에서 박규수와 만난 적이 있더냐? 알지 못하면 민태호 아저씨에게 소개시켜 주라 하면 되고."
    왕비는 태웅에게 물었다.
    왕비는 박규수의 사랑방에 젊은 사대부들이 모여든다고 하니 궁금했다. 사촌 오라버니인 민태호와 민규호가 유신환을 스승으로 섬겨 개방적인 사고를 배웠고, 유신환이 타계한 이후에는 박규수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여흥 민씨는 쇄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의정 말씀이시옵니까? 예 연경에서 만난 적이 있사옵니다. 안 그래도 저더러 한번 집에 들르라고 했습니다."
    "잘 됐다. 박대감 집에 가보거라. 그 집 사랑방에 북촌 사대부들이 많이 모인다 하니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들어보거라. 너도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태웅이 박규수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 도포를 펄럭이며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크지 않은 키에 광채가 나는 눈으로 태웅을 쳐다보았다.
    "환재(瓛齋·박규수의 호) 선생 댁으로 가는 길이오?"
    "예 그렇습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김옥균이었다.
    "고우(古愚·김옥균의 호)는 여기서 뭘 하는가?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시게."
    동생 박영효를 데리고 온 박영교가 활발하게 말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는 의욕과 탐구열이 넘치는 젊은 사대부들로 활기가 넘쳤다.
    내로라하는 북촌 출신이거나 거족(巨族)의 자제들이었다.

    박규수.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굴곡이 많았다.
    그를 처음 발탁한 사람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였다.
    개혁 군주를 꿈꾸던 효명세자가 암행 나갔을 때 글 읽는 소리가 아름답고 글이 좋아 점찍었던 자가 박규수였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박규수의 꿈도 좌절되었다.
    철종이 승하하고 효명세자의 비인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박규수를 잊지 않았다.
    제일 먼저 박규수를 불러들인 것이다.
    박규수는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의 손자답게 나라 밖 사정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평안감사 시절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겪으면서 양이(洋夷)의 무력을 본 후로 더욱 부국강병책을 고민해왔다.
    이 무렵 역관으로 수차례 연경을 다녀온 오경석과 뜻이 맞았다.
    오경석은 아편전쟁으로 무너지는 청나라를 보면서 조선의 위기를 예감하고 있었다. 오경석이 청국에서 서양 서적을 사들여와 박규수와 친구인 유대치에게 넘겨주었다.

    이날 박규수의 사랑방 윗자리에는 김윤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얼굴이 뾰족하고 콧날이 날카로운 김윤식은 박규수와 인척간이었다. 김윤식은 유신환에게 배우다 스승이 타계하자 일찌감치 박규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민태웅이라고 합니다."
    태웅이 낯선 분위기를 물리치기 위해 인사를 했다.
    "전 오늘 금릉위를 모시고 왔습니다."
    박영교가 씩씩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박영효를 소개했다.
    박영효는 눈썹이 마치 여인처럼 그린 듯 고왔고 또렷한 코와 입이 인상적이었다.
    박규수는 친척인 박영효를 철종의 무남독녀인 영혜 옹주의 사윗감으로 천거했다. 박영효는 12세 때 부마로서 금릉위란 작위를 받았지만 가례를 올린지 3개월만에 영혜 옹주가 숨을 거두는 불상사를 겪었다. 부마는 재혼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였다.
    홍영식은 얼굴이 크고 넓적했는데 커다란 눈알을 굴리기만 할 뿐 말수가 적었다. 대원군의 측근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홍순목의 아들이었다.
    성마른 인상의 서광범은 태웅을 쳐다보며 살짝 찌푸렸다. 목소리가 가늘고 높았다.
    "어디 민씨이신가? 돌림자가 낯설어서 물어보는데."
    "여흥 민간데요. 아버님께서 돌림자는 일부러 안 넣으셨어요. ‘영(泳)’자 돌림 항렬입니다."
    중전과 같은 여흥 민씨이면서 항렬을 안 쓴다는 말에 모두 의아해했다.
    "그럼 운미(芸楣·민영익의 호)와 같은 항렬이군."
    서가에 놓인 책을 이리저리 들추던 김옥균이 물었다. 김옥균은 민영익과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민영익은 민태호의 아들이지만, 중전의 오라버니인 민승호가 불운하게 폭사한 이후 양자로 들어갔다. 총명하다는 민영익을 양자로 택한 건 중전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잘 왔네! 요즘 운미는 과거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더군 하하하."
    김옥균은 유길준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턱이 크게 각지고 볼이 두툼한 유길준은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유길준은 과거 공부에 매달리다 박규수가 <해국도지>를 읽어보라고 안긴 뒤 과거 준비를 때려치웠다. 김옥균은 그런 유길준을 은근히 놀리는 것이었다.
    김옥균은 22세 때 장원급제한 특출난 수재였다.
    스스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김옥균은 60년 세도를 펼쳤던 안동 김문의 총아였다. 안동 김씨의 좌장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김좌근의 아들인 김병기가 세도를 휘둘렀고, 김병기가 신동 소릴 듣던 김옥균을 양자로 들였던 것이다. 김옥균은 김홍집이 스승인 박규수에게 소개하면서 사랑방에 드나들게 됐다.
    "서재필도 과거에 붙으면 온다고 했으니 인재들이 속속 모이겠군! 좋은 일이야!"
    김옥균이 흥분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2부 4화는 2021년 6월 4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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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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