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카드 수급난항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립PC 시장이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과열 양상을 보이던 암호화폐 시장이 최근 주춤하면서 채굴 수요가 줄어들고, 처음부터 채굴 성능을 제한한 그래픽카드 신제품이 등장하면서 대책 없이 치솟던 그래픽카드 가격이 점차 안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엔비디아의 새로운 플래그십 그래픽카드 ‘지포스 RTX 3080 Ti’가 출시된 4일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이 제품은 하드웨어 단계에서 암호화폐 채굴 성능을 절반 수준으로 낮추는 LHR(lite hash rate) 기능이 적용됐다. 즉 그래픽카드 대란의 최대 원인으로 꼽히는 채굴 업계에서 비싼 돈을 내고 가져갈 가치가 없는 제품으로 등장했다.

게다가 지포스 RTX 3080 Ti의 초기 출시 가격은 대부분 170만 원대부터 시작했다. 4일 기준으로, 200만원을 훌쩍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던 하위 모델 ‘지포스 RTX 3080’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다. 당연히 3080 Ti의 출시 이후 3080의 거래 가격은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포스 RTX 3080 Ti(사진)는 그래픽카드 유통 가격 하락의 도화선이 됐다. / 엔비디아
지포스 RTX 3080 Ti(사진)는 그래픽카드 유통 가격 하락의 도화선이 됐다. / 엔비디아
특히 싼 값에 미리 사뒀다가 ‘미개봉 중고’라는 이름으로 되파는 리셀러들이 가격을 내리기 시작했다. 리셀러들이 대거 몰려있는 중고나라, 당근마켓 등에서는 지난 4일 이전까지 최대 220만~230만원 하던 RTX 3080 ‘미개봉 중고’의 가격이 주말이 지난 7일 무렵에는 170만원대에도 등장했다. 하루 평균 10만원씩 떨어진 셈이다.

상위 모델인 RTX 3080의 가격이 급격히 내려가면서 하위 모델의 가격도 덩달아 하락세로 돌아섰다. 3080 Ti 출시 이전까지 170만원~180만원 하던 RTX 3070 모델도 순식간에 120만원선까지 떨어졌다. 3060, 3060 Ti 등 하위 모델 역시 가격이 뚝뚝 내려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3080 Ti 출시를 전후로 RTX 3080 이하 그래픽카드의 소매점 공급 물량이 부쩍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신규 구매를 중단한 채굴 업계 및 신제품 출시로 더는 그래픽카드 가격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워지자, 일부 중간 유통상들이 최대한 비싸게 팔려고 사재기했던 물량이 소매 시장에 풀리는게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 하나의 도화선 ‘지포스 RTX 3070 Ti’

그뿐만이 아니다. 3080 Ti와 함께 발표했고, 10일부터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하는 ‘지포스 RTX 3070 Ti’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그래픽카드 가격 안정화의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3080 Ti의 초기 출시 가격을 고려하면 3070 Ti의 초기 출시 가격은 100만원 안팎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그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3070 이하 하위 제품들의 가격도 그에 맞춰 더욱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10일부터 출시하는 지포스 RTX 3070 Ti(사진)는 그래픽카드 가격 안정화를 더욱 가속할 전망이다. / 엔비디아
10일부터 출시하는 지포스 RTX 3070 Ti(사진)는 그래픽카드 가격 안정화를 더욱 가속할 전망이다. / 엔비디아
특히 3070 Ti는 소수의 하이엔드 사용자들을 위한 제품인 3080 Ti보다 좀 더 대중적인 사용자를 위한 모델이다. 초기 판매 물량이 매우 적은 것으로 알려진 3080 Ti와 달리, 처음부터 많은 물량이 시장에 공급될 전망이다. 물량이 많을수록 초기 프리미엄 역시 사그라지고, 그만큼 실제 유통 가격도 빠르게 안정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픽카드 공급이 늘고 가격이 안정화되면 조립PC 시장에도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대란’이 한창일 때만 해도 그래픽카드 한 대 가격이 기존 PC 한 대 가격에 맞먹거나 더 비쌌다. 결국 조립PC 한 대 가격이 250만원~300만원을 훌쩍 넘기 시작했고, 이는 소비자들이 조립PC 구매를 포기하고 지갑을 닫게 하는 원인이었다.

그래픽카드 제품 가격이 ‘조금 비싸도 살 만한 가격’까지 떨어지면 구매를 완전히 포기했던 소비자들도 다시금 지갑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그간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을 뿐, PC 수요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픽카드의 가격이 정상 수준인 지난해 3분기 시절로 완전히 회복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반도체 부족 현상이 아직 현재 진행 중이고, 물류대란도 겹치면서 반도체를 비롯한 기초 소재들의 가격도 덩달아 오르는 등 이래저래 악재들이 겹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오래갈 것 같던 그래픽카드 대란이 서서히 끝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이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 등으로 개인용 PC 수요는 그 어느 때 보다 높은 상태다. 그래픽카드 대란이라는 역대급 악재를 딛고 하반기 PC 및 관련 업계가 얼마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