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5) 강 상궁의 마음을 사로잡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6.11 23:00

    [그림자 황후]

    2부 (5) 강 상궁의 마음을 사로잡다


    "여보시오! 강 상궁!"
    김옥균이 눈앞에서 달아나는 여인을 애타게 불렀다.
    장옷을 쓰고 골목을 빠져나가던 강 상궁이 우뚝 섰다.
    ‘지금 날 부르는 거야?’
    김옥균은 숨 가쁘게 다가와 강 상궁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강 상궁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강 상궁의 녹색 장옷이 짙은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중궁전의 강 상궁 맞소?"
    "………"
    "내 홍문관에서 강 상궁의 필체를 보고 한두 번 감탄한 게 아니오. 누구인지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겼소. 아 참 난 김옥균올시다."
    경계심에 잔뜩 찌푸리고 있던 강 상궁은 ‘김옥균’이란 말에 움칠했다.
    김옥균은 신동으로 이름을 날려 김병기가 싸 오듯 양자로 데려온 자 아닌가. 이른 나이에 장원급제한 것도 유명세를 더했다.
    "무슨 일인데 길을 막고 이러십니까?"
    "놓칠까 봐 실례했소. 내 강 상궁을 만나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소. 글이 단아하면서도 절도가 있고, 그런가 하면 달리는 말의 격동이 느껴지는 신묘한 운필이오."
    강 상궁은 장옷 아래서 얼굴이 붉어지고 몸이 더워졌다.
    ‘이 양반은 그걸 어찌 알았을까!’
    대왕대비마마와 중전마마에게 칭찬은 들었지만 사대부에게 이런 호평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신기하고 반가워 가슴이 뛰었다.
    "내 평소에는 진서(眞書·한문)를 많이 쓰지만 언문 쓰기도 좋아하오. 그래 더 강 상궁의 글씨를 더 눈여겨 봐뒀소.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부탁요?"
    "이런 쯧쯧 비가 쏟아지네. 자 이거라도."
    김옥균은 가지고 있던 우의를 펼쳐 강 상궁에게 걸쳐주었다.
    강 상궁의 몸에서 부드러운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대궐 궁녀들의 미모는 알아주지만 강 상궁의 반듯한 이목구비는 서사상궁이라는 기예를 더해서인지 반짝였다.

    "에구머니나!"
    강 상궁이 펄쩍 뛰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옷이 너무 젖을까 그리 한 거니 무례했다면 용서하시오."
    김옥균의 도포도 젖어서 축 늘어졌다.
    "다음에 언문으로 쓴 글을 하나 주시오. 내 그걸 보며 연습하고 싶소이다."
    "저는 중궁전에 매인 몸이니…."
    "글이 되면 다음 달 보름 탑골 승방으로 갖다 주시오."
    김옥균은 한번 씨익 웃더니 날 듯이 사라졌다.

    나가노 교타로는 아사쿠사에 문을 연 서양요릿집에 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탔다.
    어릴 적 친구인 니시무라가 만나자고 한 것이다.
    "늦어서 미안하네 일이 워낙 많아야지."
    양복을 차려 입은 니시무라가 반갑게 맞았다.
    "자네 요즘 형편이 괜찮은가? 행색이 좋아졌군. 서양요릿집에서 만나자 하고."
    나가노는 서양요릿집에서 수프 들고 마시다 옷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도쿄는 서양 따라하기 대회를 벌이는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외무성 일이 그렇게 많은가?"
    "자네한테만 얘기하는데 아무래도 조선을 칠 거 같아."
    나가노는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뭐? 드디어 정한(征韓·조선 정벌)인가!"
    "쉿! 조용히 하라구!"
    "아 미안 미안. 드디어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소원이 성취되는군! 축배를 들어야겠어."
    나가노는 친구가 포도주를 주문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솔직히 이타가키만의 소원은 아니지. 사이고나 기도, 오쿠보 모두 정한론자 아닌가."
    "음 그러고 보니 유신 주역들이 모두 정한론자네 하하하. 사이고는 정한론을 밀어붙이다 안되자 낙향까지 했는데 갑자기 조선은 왜 친다는 거야?"
    니시무라가 핏빛보다 붉은 포도주를 조심스레 따르며 물었다.
    나가노는 값비싼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안에서 굴렸다.

    "불만 세력들이 배출할 길을 만들어줘야지. 이타가키도 정한론을 주장하다 밀려서 민권(民權) 운동한답시고 돌았잖아. 불만 많은 무사들이 그 아래로 몰려들고 있고. 사이고는 아예 군사학교를 세워 불평하는 무사들을 키우고 있으니 정부가 골치 아플 수밖에. "
    "역시 외무성에 있으니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아는군."
    니시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항한 뒤로 서양 수입품이 쏟아져 들어오니까 모든 게 비싸졌어. 무사들뿐만이 아니라 다들 불만이야. 민권 운동한다며 신문을 자꾸 부추기니까 사람들 불만도 더 커졌어."
    나가노는 취기가 돌자 말이 자유로워졌다.
    "메이지 정권은 사쓰마와 조슈, 도사 번의 합작품 아닌가. 그런데 사쓰마의 거두인 사이고와 도사 번의 이타가키가 저렇게 반기를 드니 권력자들이 뭘 택하겠나."
    "그러나 조선이 계속 천황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을 무시하는데 이번엔 잘 될까?"
    나가노는 문득 왜관에서 만난 조선 청년이 생각났다. 도포는 입었지만 계집 같아 보이던 곱상한 자태가 계속 아른거렸다. 조선에 가면 다시 찾아보고 싶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데려오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조선의 사절이 오면 일본 유자(儒子)들은 필담이라도 나누고 글을 받기 위해 얼마나 목을 뺐던가. 조선을 지금같이 미개인 취급하는 건 아닌듯싶기도 했다.
    더욱이 이번 일에 육군 중장인 구로다 기요타카가 특명전권대신 물망에 오르고 있다니 한심했다. 구로다는 만취하면 개가 되는 인간이었다.
    부사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거명되는데, 그는 오자리자와 광산 불하 사건으로 사법성의 조사가 임박했다. 같은 조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가 절친한 이노우에를 구하기 위해 부사로 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음- 잘 되겠지. 페리 제독이 구로후네(흑선·黑船)를 몰고 우리에게 온 것처럼 우리도 구로후네를 몰고 조선에 간다고 하니까 말야."
    나가노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22년 전 우라가 항에 구로후네가 나타났던 때를 분명히 기억했다. 페리는 4척의 거함을 끌고 와 미국 독립기념일이라며 대포를 쏘아대고, 훈련한다며 공포탄을 쏘아 올려 겁에 질리게 했다. 무장한채 대통령 친서를 전하겠다며 쇼군이 있는 막부로 쳐들어갈듯 위협했던 자들이었다.
    "니시무라! 술이나 마시지 뭘 그렇게 캐물어?"
    "실은 얼마 전에 <도쿄니치니치신문>에 입사했다네."


    (2부 6화는 2021년 6월 18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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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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