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6.18 23:00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도쿄니치니치신문?"
    나가노는 눈꼬리가 홱 올라갔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이거 신문에 쓸 거야?"
    정권 실세인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가 자신의 발설을 안다면 할복을 지시할 것이다.
    "진정해. 설마 친구를 사지(死地)로 몰겠나."
    니시무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가노를 달래듯 포도주를 한 병 더 시켰다.
    "자- 오늘 얘기는 걱정 말아. 사무라이로서 맹세하지!"
    나가노는 포도주를 가득 따르자 마음이 좀 풀어졌다.
    "이번엔 내가 좀 알려줄까?"
    말상인 니시무라가 차가운 눈빛으로 잔을 굴렸다.
    서양요릿집에 앉은 남자들은 상투를 자른 잔기리를 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둥근 방석 같은 히사시카미 머리에 하카마를 많이 입고 있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조약을 맺은 건 아나?"
    "난 조선에 관계된 일만 한다구."
    나가노는 퉁명스레 대꾸하며 올리브를 한 알 입에 넣었다.
    "일본이 쿠릴 열도를 갖는 대신 러시아에 사할린을 넘겨준 거야. 재밌는 건 러시아와의 밀거래 내용이지."
    "밀거래?"
    "음 일본이 조선을 치고 들어가도 러시아가 놔두기로 한 거야."
    나가노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메이지 실세들이 권모술수로 정권을 잡더니 이젠 러시아와도 그런 거래를 하는군."
    취기가 오른 나가노가 내뱉었다.
    "나가노, 이토와 이노우에의 줄을 잡고 있으면서 꽤나 위험한 발언을 하는군 흐흐흐."
    니시무라가 비꼬았다.
    "게다가 바보 같은 지나(支那·청국)는 ‘조선의 내치와 외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비공식적으로 대답했다는군. 지나와 러시아가 OK 했으니 이제 일본은 조선을 치는 데 거칠 게 없어!"
    "자넨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나?"
    "외무성에서 출세하려면 고급 정보가 있어야지. 일본이 대만을 정벌하니까 놀란 영국 공사가 오쿠보 내무경에게 이렇게 말했다는군. ‘일본이 대만이 아니라 조선으로 진출한다면 열강들이 지원할 것이오’라고. 중국을 뺏기기 싫으니까 조선을 던져준 거지."


    "강 상궁, 무슨 일 있는가?"
    강 상궁은 중전의 부름을 받고 민겸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서(代書)하고 있었다.
    "예? 마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김옥균을 만난 이후 며칠째 잠을 설쳐 머릿속이 혼미했는데, 중전의 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중전은 매우 예민했고 판단이 빨랐다.
    ‘혹시…내 뒤라도 밟은 게 아닐까?’

    궁녀는 왕의 여자였다.
    사내와 사사로이 만났다면 끌려가 곤장을 맞고 유배나 극형을 받았다.
    중전은 대원군 무리들 때문에 신경이 몹시 날카로운 상태였다. 대원군 추종 세력들은 상소를 올리며 왕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강 상궁 손톱에 먹물이 끼여서 말일세. 그 손톱에 먹물이 든 건 처음 보는데."
    중전은 강 상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강 상궁은 옷에 먹물이 튀는 일은커녕 손에 먹물이 묻는 일도 없었다.
    "황, 황송하옵니다 마마, 오늘 먹을 갈고 벼루에 놓는다는 게 그만 거꾸로 놓아 이리 되었사옵니다. 불민한 소인을 용서하옵소서."
    "강 상궁이야 워낙 먹을 곱게 갈아 글씨가 가볍고 부드럽지… 고민이 있나 했네."
    강 상궁은 여자 살결보다 더 고운 벼루에 먹을 갈면서 정성을 다했다. 글씨는 맑은 먹물만큼 상쾌하면서도 단아해 대궐 웃전들이 좋아했다.
    강 상궁은 붓을 든 채 덜덜 떨었다.
    "조심 또 조심하겠사옵니다."
    "강 상궁, 오늘은 자네 일진이 좋지 않은 듯하니 그만 물러가게."


    강 상궁이 중궁전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다섯 살부터 대궐에 들어와 층층시하에서 지낸 궁녀들은 강 상궁에 대한 시샘이 많았다. 입궁이 늦었는데도 재주가 출중해 대왕대비에게 총애를 받더니 중전에게 발탁된 것이다. 궁녀들은 강 상궁이 파격적으로 승급한 점도 약이 올랐다.
    강 상궁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처소로 돌아왔다. 중전도 무섭지만 궁녀를 감독하는 제조 상궁과 감찰 상궁의 눈도 조심해야 했다.


    드디어 내일이 보름이었다.
    마침 내일은 번을 서지 않아 중전이 찾는 일도 없으리라.
    ‘아냐 가지 않을 거야. 사내에게 그만치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그러나 이미 김옥균에게 줄 글을 써놓았다.
    눈같이 새하얀 순지(純紙)에 쓴 <소학>의 앞 구절이었다.
    강 상궁은 무엇에 홀린듯 옷을 훌훌 벗고 몸을 닦기 시작했다.
    백자 같은 피부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었다.
    이때 허드렛일을 돕는 비자가 바깥에서 외쳤다.
    "앗 마마님! 감찰 상궁 마마님이 오셨수!"


    1876년 1월.
    나가노는 예측대로 구로다가 전권대사, 이노우에가 부사를 맡은 ‘대(對)조선 특사’에 차출됐다.
    일본의 포함(砲艦) 운요호는 4개월 전 사전 예고도 없이 해안을 측량한다며 강화도 깊숙이 들어가 조선 수비대의 포격을 자초했다. 운요호 함장은 출항에 앞서 "조선이 포격을 가하면 운이 좋은 것"이라며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포격을 받은 운요호는 군인을 상륙시켜 살인과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공격을 받았다며 구로다 기요타카 전권대사를 보내 강력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군함 닛신과 모슌 2척과 운송선 다카오마루, 교류마루, 하코다테마루, 본함인 겐부마루로 ‘대 조선 선단’을 구성했다.


    나가노가 배에 오르자 이노우에가 불렀다.
    "이번 임무는 엄중하니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라!"
    "옛!"
    나가노는 얼굴에 칼자국이 선명한 이노우에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무쓰의 고향 후배이자 포병 소좌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조선과 관련해 활약할 사람이니 서로 잘 알아두게."
    ‘면도칼’이란 별명을 가진 무쓰 무네미쓰는 외무성 초기부터 재직했고, 이토 히로부미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운요호 사건의 거대한 그림을 주도한 자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미천한 신분에서 시작해 다이묘를 뛰어넘는 파격 승진을 하더니 지금은 공부경(공부성 장관)에까지 올랐다. 메이지 정부의 음과 양이 그의 손을 거치고 있었다.
    나가노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발설할 경우 암살될 게 분명했다.
    거대한 선단이 바다를 칼로 가르듯 조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2부 7화는 2021년 6월 25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2부 (5) 강 상궁의 마음을 사로잡다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그림자 황후 2부 (2) 사무라이의 메이지유신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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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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