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라! 쪼오옴"

영화 ‘아저씨’에서 마약 조직원 ‘종식(김성오 분)’이 형 ‘만석(김희원 분)’에게 한 말이다. 갑자기 자신의 도끼를 빼앗아 살인을 저지르자 깜짝 놀라 내뱉은 불만이다.

현실도 비슷하다. 베테랑이라고 자부하는 꽤 많은 운전자는 끼어들기 전에 차량 머리부터 들이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간을 우선 확보한 뒤 방향지시등을 켜야 한다는 것이다. 초보 운전자에게 먼저 깜빡이를 켜면 뒷차가 공간을 내주지 않고 바짝 붙여 진입이 어려워진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안전과 질서를 위한 신호와 약속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상황을 비꼰 얘기다.

가상자산 정책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정부가 내놓은 정책이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오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가상자산 투자가 잘못된 것이니 교육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정부는 시장을 압박했다. 그 수준은 연일 거세진다. 결국 가상자산 거래소(이하 거래소)를 상대로 교육을 해주겠다더니 제대로 된 수업 한 번 없이 낙제 성적표를 발급하려 한다. 최근 거래소가 무더기 상장 폐지 조치를 내린 배경이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한 순간에 피 같은 돈을 날리게 됐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난 이유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 원인이 다른 데 있다. 사고는 정부가 치고, 이익은 거래소가 보고, 폭탄은 투자자에게 돌아간 꼴이다.

우선 시장 정리가 무더기 상폐로 귀결된 이유는 비정상적인 상장 절차에 있다. 주식 시장의 경우 상장심사와 상장폐지 등은 한국거래소가, 증권의 유통과 보관은 한국예탁결제원이 맡는다. 증권회사는 거래 시장만 제공한다. 반면 거래소는 가상자산을 발행하고 심사하고 상장하며 보관한 후 폐지하며 모든 과정을 직접 관할한다.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손을 놨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이 가상자산 시장에 몰리고 있는 와중에도 ‘도박장’이라고 흉보며 팔짱만 끼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정부의 역할을 하겠다고 외친다. 정부의 역할은 업계와 충분히 소통하고 안전한 거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정리는 그 다음 순이다. 특금법 시행 후 정부가 투자자 피해를 명목으로 대대적 불법행위 단속에 나섰지만, ‘아름다운 퇴장’을 위한 정책 적기를 놓친 면피용 ‘쇼잉’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규제 공백을 틈타 무작위 상장 잔치를 해온 거래소가 사태를 키웠다. 거래소는 명확하고 투명한 상장 절차를 만들어 정확한 투자 정보를 알려야 했다. 되레 특금법 시행 후에도 적지 않은 가상자산을 상장했으니 돈벌이에만 급급한 모습으로 신뢰를 떨어트렸다. 유의종목 지정 전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이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여기에 단돈 얼마에 백서를 만들어 코인을 찍어낸 후 상장과 동시에 물량을 털어 한 몫 챙긴 몇몇 가상자산 발행 사업자들도 지분이 없지 않다.

결국 정부는 특금법 유예기한을 목전에 두고, 투자자만 ‘피’보는 가장 쉬운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있다. 거래소는 저간의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 ‘유의종목’을 지정해 손 안대고 코풀고 있다. 향후 발생하는 투자자 피해는 ‘깜빡이 한번’ 켜지 않은 정부와 거래소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