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7.02 23:00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배 띄워라~."
    한 잔 얼큰하게 한 태웅은 흥얼거리며 방에 들어섰다.
    "앗! 아버님!"
    태웅은 방안에 앉아있는 민범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민승호가 폭발 사고로 숨진 이후, 그 집에 머물던 태웅과 초계는 함께 나오게 됐다.
    민승호의 부인은 소문난 미인이었는데, 남편이 죽은 뒤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왕비는 오라버니인 민승호의 집안에서 추문이 나오자 엄하게 경고했다.
    민승호의 부인은 태웅을 내보내고, 눈엣가시 같던 초계도 내쫓았다. 왕비에게 추문을 밀고한 사람이 초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왕비는 태웅과 초계를 위해 집을 마련해주었다.

    "네 혼담이 들어와서 왔다. 너 사는 모습도 볼 겸해서."
    "혼담이요? 과거 준비 때문에 여념이 없습니다 아버님. 중전마마께서 하루빨리 과거를 보라 하십니다."
    "과거 준비한다는 녀석이 쯧!"
    "사실 민씨 문중이 벼슬을 독차지한다는 소리가 자자한데 저까지 한몫하는 거 같아 두렵습니다."
    "그 말은 핑계 아니냐? 사람들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지."
    "예?"
    "순원 왕후 때의 안동 김씨 세도와는 다르단 말이다. 그때는 안동 김씨들이 영의정과 좌우 정승을 번갈아 맡고, 당상관을 차지했지. 조대비 마마도 조씨를 영의정에 중용하시고. 하지만 지금은 여흥 민씨 중에 누가 영의정을 했느냐? 주상께서 친정을 하시면서 이유원 대감이 영의정에 오르지 않았느냐. 김병국 김병학 형제처럼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를 두루 기용하고 말이야."
    "하오나 당숙들이 조정의 요직에 있지 않습니까."
    "그건 중전마마의 뜻이라기보다 주상께서 원하신 거야. 대원위 대감이 물러나고 하루속히 우군을 다져야 하는데 나라 안팎에서 위협은 커지니 그나마 믿을만한 민씨를 택하신 거지."

    이때 초계가 다과상을 차려 들어왔다.
    그사이 초계는 한껏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날듯했다.
    초계를 쳐다보는 태웅의 눈빛이 흐물거리고 있었다.
    ‘설마 여종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게야?’
    태웅은 아버지의 당혹스러우면서 막막한 표정을 보자 답답했다.
    "태웅아 너 혹시…."
    "아버님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상해와 도쿄에서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 태웅이었다.

    다음날 초계는 태웅의 방에 들어가 왜서(倭書)를 찾았다. 태웅이 김기수를 따라 일본에 가기 전에 빌려 간 책이었다.
    "여기 있었네."
    초계가 책을 들자 뭔가 툭 떨어졌다. 일본식 꽃문양이 새겨진 편지봉투와 편지지였다.
    "아이 예뻐라."
    편지를 본 초계는 놀랐다. 나가노 교타로가 초계에게 보낸 편지였던 것이다.

    ‘민태웅 씨가 일본을 방문해서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함께 오지 않아 매우 안타깝고 섭섭했습니다. 그날 왜관에서 뵌 이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룻밤 정이 이토록 깊어질 줄 몰랐습니다. 민태웅 씨와 같이 오셨더라면 도쿄를 구경시켜드렸을 텐데요. 다음엔 경성이나 도쿄에서 꼭 만나길 하늘에 기원합니다.’

    이때 외출했던 태웅이 들어왔다.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발그레했다.
    "뭐 하시오?"
    태웅은 초계를 보자 뭔가 들킨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책을 찾으러 왔어요 도련님."
    초계는 태웅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관에서 만났던 일본인 아닌가요? 이 사람?"
    초계가 편지를 보이며 태웅에게 물었다. 태웅이 편지를 홱 빼앗아 구겨버렸다.
    "이상한 자식이야. 그보다 이걸 준다는 게 늦었소."
    태웅이 서가에서 작고 이쁘장한 책을 꺼냈다.
    "뭔가요 도련님?"
    "주려고 일본에서 하나 샀소."
    "예?"
    초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어로 된 작은 책을 열어보니 사랑을 노래한 시집이었다.
    "왜어를 더 많이 익히셔야겠어요 도련님. 시들이 모두 사랑시네요 호호."
    초계가 입을 가리며 놀리듯 웃어댔다.
    "다 읽어보고 산 거요!"
    얼굴이 빨개진 태웅이 초계의 허리를 꽉 안았다.
    "어!"
    태웅은 멍해지면서 순간 초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긴장했지만 초계가 가만히 있자 이번엔 힘껏 빨아들였다.

    초계가 드디어 태웅에게 마음을 열었다.
    태웅은 예전의 소년이 아니었다.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던 강렬한 눈빛의 뜻을 알게 됐다.
    태웅은 초계의 옷고름을 조심스레 풀었다.
    백작약처럼 눈부신 몸이었다.
    몸은 얇은 꽃잎처럼 희고 보드랍지만, 중심에는 짙은 암술처럼 사내를 꼼짝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날씬한 허리와 단단한 엉덩이, 보기 좋게 뻗은 두 다리가 태웅을 허둥지둥하게 만들었다.
    태웅은 초계를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초계가 ‘배 띄워라’를 불렀을 땐 완전히 마음을 뺏겼다.

    초계가 태웅의 옷을 벗기자 사정(射亭)에서 다져진 몸이 드러났다.
    활쏘기와 말타기로 돌같이 탄탄해진 몸이었다. 도포를 입었을 때보다 더 커 보이는 몸이 백작약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초계의 촉촉한 눈이 환희로 물들었다.
    태웅은 자신이 초계의 첫 사내임이 놀라웠고, 초계는 태웅의 현란한 몸놀림에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희열의 불꽃에 싸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휴 얼마 만이우!"
    초계는 강 상궁을 보자 얼싸안았다. 감찰 상궁의 명으로, 아니 중전의 명으로 궁 밖 출입을 못하던 강 상궁이었다.
    강 상궁은 바깥 출입을 못하자 자주 아팠다.
    "내가 하도 아파 누우니 마마께서 포기하신 듯해."
    "상사병인가?"
    "에그 누가 들을까 무섭다!"
    마음이 맞는 초계와 강 상궁은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다. 강 상궁은 장죽을 피며 초계에게 봉서를 전달했다. 봉서를 읽은 초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동안 뭣 땜에 금족령이 내려졌수?"
    강 상궁은 한숨을 내쉰 뒤 김옥균과의 일을 털어놓았다.
    "마마께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신 모양이야. 죽다 살아났지."
    강 상궁은 장죽을 깊이 빨며 허공을 응시했다.
    "다른 사람이 알면 난 죽는다. 입 다물어!"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나저나 한번 만나서 이야기나 들어보우."
    "그러다 발각되면 어쩌려구!"
    "한번 사는 목숨인데 뭘."
    초계는 태웅을 떠올리자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강 상궁은 저도 모르게 탑골승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일이 많이 흘렀지만 한번 가보고 싶었다.
    동자승이 강 상궁을 흘깃 보더니 또르르 들어가 종이 뭉치를 들고 나왔다.
    "이름이 월창이우?"
    "아니 어떻게 내 이름을?"
    강 상궁은 화들짝 놀랐다.
    "김 교리께서 오면 주라고 하셨수."
    강 상궁은 급히 편지들을 열어보았다.
    ‘오지 않아 몹시 걱정된다’ ‘꼭 만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듣던대로 김옥균의 글은 달필이었다.
    자신만만하면서도 박력 넘치고, 단단하고 매력적인 필체였다.
    강 상궁의 가슴이 불타올랐다.
    ‘그이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2부 9화는 2021년 7월 9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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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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