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9) 꽃 선물을 받고 울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7.09 23:00

    [그림자 황후]

    2부 (9) 꽃 선물을 받고 울다


    "자네가 나가노인가?"
    "예! 나가노 교타로입니다."
    재빨리 훑어보는 이토 히로부미의 눈이 뱀처럼 느껴졌다. 나가노의 몸을 휘감으며 얼마나 견딜지 조이는 듯했다.
    "조선과 조약을 맺었으니 가서 할 일이 많다. 자네가 조선말을 잘한다고 하더군. 조선에 대해 좀 아나?"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자네 낯이 익단 말야…혹시 이와쿠라 사절단에 같이 갔었나?"
    "예! 야마구치 공을 수종(隨從)했습니다."

    일본은 1871년 12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예비 교섭단을 임명했다.
    일명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다.
    조약 개정을 위한 예비 교섭이 가장 큰 목표였고, 나머지는 서구 문물 시찰이었다.
    이와쿠라 도모미가 단장이 되고, 부사는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구치 마스카 4명이었다.
    ‘메이지 유신 3걸’로 불리는 최고 실력자 기도와 오쿠보가 포함되고, 막후 역할을 도맡던 이와쿠라와 이토가 끼어 무게감이 컸다.

    "아 그래서 낯이 익었군."
    순간 나가노의 눈앞에는 당시 샌프란시스코 항에 끼었던 숨 막힐 듯 짙은 안개가 떠올랐다. 기선 아메리카호를 탄 사절단이 미국 땅에 밟을 딛기 직전이었다.
    사절단 대부분 서구 세계는 처음이었다.
    단장인 이와쿠라가 존마게(상투)에 일본 옷을 입겠다고 고집하자, 다른 이들이 "서양인들이 비웃는다"며 말려 단발과 양복으로 바꿨다.

    사절단은 미국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사실 미국은 쇄국을 고집하던 동양의 일본을 자신들이 개항시켰다는 자부심이 커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이들이 묵는 앨링턴 호텔로 그랜트 대통령 영부인은 300달러나 하는 환영 꽃다발을 보냈다. 이와쿠라는 "서양의 가장 격식 있는 선물을 받았다"며 감격했다.
    미국은 대대적인 환영 퍼레이드를 벌이고 매일 밤 환영 파티를 열어줬다.

    드디어 3월 4일 사절단이 백악관을 방문해 그랜트 대통령을 알현했다.
    이때 그랜트 대통령이 "조약 개정에 대해 각국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사전협의하는 모양인데 어렵지 않게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며 "오히려 급한 건 무역통상 규정을 개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메이지 정부는 치외법권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 개정이 가장 큰 과제였고, 그랜트 대통령의 뜻밖의 언질에 사절단은 흥분했다.
    마침 일본의 워싱턴 주재관이던 모리 아리노리가 "정계 거물들이 오셨는데 아예 조약을 개정해야 한다"고 부추겼고, 이토 히로부미가 적극 찬성했다.
    이와쿠라가 이토의 말만 듣고 피시 미 국무장관과 조약 개정을 협상하려 하자, 피시는 "개정 협상을 위한 전권위임장이 있느냐"며 정색을 했다.

    부랴부랴 오쿠보와 이토가 전권위임장을 받으러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독일 공사가 워싱턴을 방문해 사절단의 기도 다카요시에게 "일본이 미국에게 혜택을 주면 최혜국 조항에 따라 다른 유럽 국가에게도 똑같이 혜택을 줘야 하는데, 이를 아느냐"고 주의를 줬다.
    이와쿠라 사절단에는 누구도 ‘최혜국 조항’의 의미를 아는 이가 없었다.
    서구를 가장 잘 안다는 이토 히로부미도 몰랐고, 기도나 오쿠보는 이토보다 더 몰랐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2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열강의 간교한 술수를 몰랐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와쿠라 사절단은 조약 개정의 꿈을 접고 선진문물 시찰로 돌아섰다.
    오쿠보와 이토가 전권위임장을 받아오느라 5개월을 허비했고, 심지어 런던에서는 일본인이 낀 사기단에게 걸려 12만5000엔을 날려버리는 사건까지 있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이 여름 휴가를 떠난 바람에 또 허탕을 치며 시간을 낭비했다. 영국도 미국만큼 대대적으로 사절단을 환대했지만 조약 개정에 대해선 얼굴색을 바꿨다.
    영국은 오히려 일본에서의 종교와 내지 여행의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다.
    화가 난 기도 다카요시는 "막부 시절 내 수발이나 들던 도시스케(이토 히로부미의 옛 이름)가 나라를 망칠 뻔했다"고 비난했다.

    "조슈와 사쓰마가 어떻게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줄 아나?"
    나가노는 이토가 어떤 대답을 원할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웅번들에게는 부국강병을 도모할 자본이 있었기 때문이지."
    "혹시 도자기 말씀인가요?"
    "바보는 아니군. 도요토미 히데요시 공이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일본이 ‘임진왜란’을 부르는 말)를 일으켜 조선 도공을 끌고 오고 싶었던 거야.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가 도공들을 끌고 와서 사쓰마에키(사쓰마 도자기)를 성공시켰지. 조슈도 그렇고. 도자기를 서양에 팔아서 번
    자금이 엄청났거든. 그 돈으로 총과 대포도 사고 포함(砲艦)도 샀지."
    "예…."
    "조선은 미개해 보이지만 간단한 나라가 아닐세. 조선에 가서 핵심인사들과 친분을 쌓아둬. 자네가 외무성에 올린 보고서를 보니 왕비 민씨의 조카와 만난 적이 있더군. 이들을 손아귀에 넣고 내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게 군의 임무다."
    "옛!"
    "특히 왕비의 측근을 파악해서 우리 사람으로 만들라구. 나같이 적의 칼날 위를 날아다녔던 사람은 특별한 촉수가 있거든. 왕비는 앞으로 일본이 가장 주시해야 할 대상이다. 명심하라!"

    한성의 지전(紙廛)에 일찍부터 삿갓을 눌러쓴 자가 나타났다.
    그는 ‘최 보따리 선생’의 지시에 따라 좋은 종이를 사러 왔다.
    ‘조선 닥나무로 만드는 한지가 천하일품이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도 고려 종이를 최고로 쳤었지. 백번 손질한다 해서 백지(百紙)라고도 한단다. 천년을 가니 얼마나 대단한지."
    스승은 한때 조지소(造紙所)에 있어서였는지 한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가게에는 크고 두꺼운 장지에서부터, 넓고 긴 대호지, 순창에서 나는 상화지(霜花紙), 꽃무늬가 찍힌 능화지(菱花紙), 얇으면서도 튼튼한 죽청지, 매미 날개같이 얇다는 선익지(蟬翼紙)가 뽐내고 있었다.

    이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휴 예뻐라, 이 궁전지(宮箋紙) 좀 봐요. 분홍 바탕에 나비랑 꽃무늬가 있어요. 마마께 올리면 좋아하시겠다."
    "내가 사줄 테니 쓰시오. 마마께는 중궁전에서 알아서 올릴 텐데 뭐. 자나 깨나 중전마마만 생각하오?"
    "어머 이걸 사주신다고요?"
    장옷을 걸친 초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교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초계의 보조개가 깊숙이 패였다.
    초계와 태웅 두 사람의 눈이 부딪치자 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태웅이 슬쩍 초계의 장옷을 당겼다.
    초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 사람은 초계가 아닌가!’
    삿갓을 쓴 자가 손에 들었던 종이를 툭 떨어뜨렸다.
    강원도에서 스승 해월의 심부름을 온 달수였다.

    (2부 10화는 2021년 7월 16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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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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