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연합회가 업계 요청에 따라 위험평가 항목을 구체적으로 밝혔지만 규제 불확실성은 끝내 해소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상자산 거래소(이하 거래소)의 신고수리 필수요건인 실명계좌 발급 조건은 결국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은행연합회는 은행이 가상자산 사업자 관련 자금세탁 위험을 식별·분석·평가하는 기준 마련 시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가상자산사업자 자금세탁 위험 평가방안’의 개략적인 내용을 8일 공개했다.

앞서 은행연합회는 4월 해당 방안을 마련해 은행에 기 배포했지만 해당 내용을 비공개로 했다. 각 은행이 자율적으로 업무 기준을 수립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참고자료 성격이어서 비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또 은행연합회는 평가 방안의 상세 내용이 공개될 경우 가상자산사업자가 공개된 평가 기준에 따른 요건만을 선택적으로 충족시켜 자금세탁 위험도를 본래보다 낮게 평가받는 행위 등을 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도 이유다.

은행연합회는 "최근 일부 내용이 알려지면서 오해가 증폭되고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며 "투자자 보호를 위해 평가방안 주요 내용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실명계좌 발급 조건 ‘원시적 불능’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의 최근 화두는 실명계좌 발급이다. 3월 25일 일부 개정된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호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에 따르면 원화마켓을 운영하는 거래소가 영업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를 발급받아야 한다. 하지만 가상자산 사업자에 자금세탁방지의무를 부과하는 특금법에는 발급 조건을 명시하지 않았다. 시장 혼란이 발생한 이유다.

이는 특금법이 은행으로 하여금 자체 기준으로 실명계좌를 심사하고 발급하게 한 영향이다. 정부가 은행을 통해 가상자산 사업자를 규율하는 간접규제 형태다. 이 경우 은행은 자의적 판단으로 실명계좌를 발급해야 한다. 이에 각 은행은 발급 기준 가이드라인을 정부에 요청했지만 정부는 ‘은행 소관’이라며 선을 그었다.

결국 시장은 채점 기준이 없어 정답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방치됐다. 규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실명계좌는 특금법의 ‘블랙홀’과 같은 존재가 됐다. 정부가 거래소 심사 책임을 은행에 떠넘겼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진짜 문제는 정부가 실명계좌 발급과 자금세탁방지 시스템 구축을 동일시 한 데서 발생했다. 정부는 일찍이 ‘가상통화 가이드라인’을 통해 자금세탁위험이 높다고 인정할 경우 은행이 실명계좌 거래를 거절하거나 종료할 수 있도록 권고했다. 실명계좌가 없으면 자금세탁위험이 높다고 봤다. 결국 자금세탁위험이 높기 때문에 실명계좌를 발급받을 수 없는 ‘원시적 불능’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원시적 불능이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을 뜻한다.

가까스로 발급 조건 시행령 위임 했지만 ‘원점’

규제 공백의 위험을 인지한 국회와 업계는 정부에 실명계좌 발급 조건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급기야 국회는 발급 조건을 명시해야 법을 통과시켜주겠다는 강수를 뒀다. 그제서야 발급 조건을 시행령에 명시하는 한편, 법률안에 ‘실명계좌 기준과 조건을 시행령에 규정할 때 국회와 협의하도록 한다'는 선언적 내용을 추가했다. 초안에는 이 같은 위임 규정도 없었다는 얘기다.

시행령에 발급 조건이 명시됐지만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발급 조건에는 특금법에서 언급한 내용이 반복됐다. 위험평가 기준도 마련되지 않았다. 이미 금융기관의 확인의무 사항으로 명시된 ▲예치금과 고객자산 구분·관리 ▲금융관련 법률 위반 및 신고 말소 4년 미경과 여부 확인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자금세탁방지 위험평가 등이 담겼다.

이번 은행연합회가 내놓은 위험평가 기준도 마찬가지다. 위와 다르지 않다. 은행연합회는 실명계좌 개시 조건으로 ▲ISMS 인증 획득 여부 ▲금융관련법률 위반 이력 ▲예치금·고유자산 및 고객별 거래내역 구분·관리여부 ▲다크코인 취급 여부 ▲금융정보분석원(FIU) 신고 유효여부를 명시했다. 대부분 특정금융법에 명시된 신고수리 조건이다.

특히 FIU 신고를 실명계좌 발급을 위한 점검 항목으로 명시하면서 또 다시 원시적 불능에 빠진 모습이다.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하면 신고수리를 못하는데, 신고수리를 받지 못하면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실낱 같은 ‘확인서’도 불투명

그나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위험평가를 통과한 경우 실명계좌 확인서를 발급하도록 한 점이다. 정부는 지난 5월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한 거래소로 하여금 9월 24일까지 은행의 위험평가를 통과했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받도록 하면서 시장도 숨통이 트였다. 은행연합회도 실명계좌 발급 요건으로 FIU 신고를 언급한 것은 확인서 발급을 염두에 둔 결과라는 설명이다.

은행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은행의 자금세탁방지담당부서는 거래소에 대해 필수 요건을 점검하고 고유위험과 통제위험을 평가한다. 이를 종합해 위험등급을 산정한다. 등급에 따라 영업부 등 타 부서에서 거래 여부를 결정한다.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않은 거래소의 경우 위험평가 확인서를 받아 정부에 제출할 수 있도록 했다.

은행이 확인서를 발급키로 한 것은 실명 계좌 해지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다. 위험평가를 마치고 자금세탁위험이 적다고 판단해 실명 계좌를 발급해줬는데, 이후 정부가 범죄이력이나 해킹 등을 이유로 해당 거래소의 신고수리를 거절할 경우 은행은 난감해진다. 은행은 확인서를 발급해주되 실제 계좌를 터주진 않는다. 최종적으로 신고가 수리되면 계좌를 열어주겠다는 얘기다.

현재 확인서 발급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원시적 불능 논리를 또 다시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실명계좌를 보유하지 않은 곳은 자금세탁위험이 높기 때문에 실명계좌를 발급해 줄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이 계속되고 있다.

국내 거래소 관계자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사업을 계속 할지 접을 지 결정할 수 있다. 어떤 인력을 어느 규모로 채용해야 하는지,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은 어떻게 얼마나 갖춰야 하는 지 알아야 투자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며 "만약 직원이 10명에 불과한 거래소가 실명계좌를 받기 위해 적어도 30명의 준법인력을 채용해야 한다면 폐업을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일단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