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1) 청룡(靑龍)이 나르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7.23 23:00

    [그림자 황후]

    2부 (11) 청룡(靑龍)이 나르샤


    왕은 금릉위 박영효와 김옥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영효는 왕을 자주 알현하면서 김옥균에 대해 이야기했고, 마침내 왕 앞에 나오게 했다.
    "경이 나라 밖 정세에 관심이 크고 식견도 있다고 들었소."
    눈에서 빛이 나는 왕은 스물여덟, 김옥균은 스물아홉.
    펄펄 끓어오르는 왕성한 기가 맞부딪쳤다.
    왕은 부국강병의 꿈을 앞두고 밤잠도 설치며 부풀어 있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소신 미욱하오나 나라를 위해 개화는 한시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일본을 보면 왜왕과 신료가 한 몸이 되어 태서(泰西·서양)의 기술을 익히고 있사옵니다. 무기와 군대를 정예화하니 서양도 넘보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사옵니다. 우리도 타국과 통교하고 부지런히 기술을 배우면 반드시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옵니다."
    "일본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앞으로 틈이 벌어지지 않게 하면서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배우면 두려울 것이 없사옵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동양의 법국(法國·프랑스)이 될 수 있사옵니다!"
    왕과 김옥균의 대화는 십장생 병풍 뒤로도 들렸다.
    왕비가 조용히 병풍 뒤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왕은 개화 정책을 서둘러 펼치기 위해 정보 수집과 인재 양성에 나섰다.
    이를 수행할 인물로 박규수 문하에서 배운 자들을 뽑았다.
    우선 김홍집이 이끄는 수신사를 일본으로 보냈다.
    김홍집은 아버지 김영작이 박규수와 막역한 사이였고, 개혁적인 가풍 속에서 자란 자였다.
    일본의 동향을 살피고, 그들이 종용하는 인천 개항과 관세 문제를 협상할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대접은 후하게 하면서도 정작 협상을 회피했다.
    김홍집은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의 참사관 황준헌을 만나 세계정세에 대해 들은 뒤 <조선책략>을 청해 받아왔다.


    1880년 12월.
    왕은 개항 이후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할 ‘통리기무아문’을 세우라고 명했다.
    의정부나 6조 체제는 개화 추진에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민씨 척족의 중심이 된 민겸호가 중요한 군무와 변정을 담당하는 당상에 임명됐다. 신정왕후의 조카인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덕, 영의정 이최응(대원군의 형)의 아들 이재긍이 당상에 뽑혀 새 기구의 무게감을 보여줬다.


    통리기무아문은 어윤중이 포함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김홍집의 <조선책략> 이후 반왜(反倭) 척사파의 반발이 거세 ‘동래부 암행어사’란 이름으로 몰래 파견해야 했다.
    서구의 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꾸려졌던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과 같은 성격의 시찰단이었다. 규모나 기간은 비교할 수 없이 적었지만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보냈다.
    어윤중에게 대장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맡기고 박정양에게는 외무성, 민종묵에게는 세관, 홍영식은 육군성을 조사하게 하는 등 분야별 역할을 주었다.
    명문가 출신으로 경력이 풍부한 젊은 관료들이었다.
    어윤중은 세금과 예산 등 재정에 대한 세세한 조사를 마친 뒤 유길준과 윤치호 유정수 김양한을 국비 유학시켰다. 이 중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윤웅렬의 아들 윤치호는 영어학교인 도진샤(同人社)에 들어갔다.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의 후폭풍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청국과는 긴밀히 지내고, 일본·미국과 손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청나라 관리가 준 책으로, 개화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자 관리와 유생들에게 읽혔는데 거센 반발이 일었던 것이다.
    척사파들은 "금수 같은 오랑캐와 손을 잡으라니 망국의 길로 가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은 집단 상소인 ‘영남만인소(萬人疏)’를 올리며 이를 주도했다.
    개화를 추진하는 왕과 신하들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


    척사파가 들고 일어나자 대원군의 복귀를 노리던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원군 측근이던 안기영이 국왕을 끌어내리고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李載先)을 옹립하기로 모의한 것이다.
    반란군을 3군으로 나누어 제1군은 왕궁을 습격해 국왕을 폐위하고, 제2군은 외척과 재상들을 타살하며 제3군은 일본공사관과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하여 일본인을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한다는 음모였다.
    역모는 거사하기도 전에 가담자였던 이풍래가 포도청에 밀고하면서 발각됐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주모자는 참형을 당하고 이재선은 제주도로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았다.


    "전하 미음을 쑤어왔습니다."
    왕비가 미음을 한술 떠 왕에게 올렸다.
    "중전 미안하오. 생각이 없소."
    초췌해진 왕이 손을 내저었다.
    배다른 형이 역모에 연루됐다는 사실에 왕은 치를 떨었다.
    더욱 분노한 것은 이들을 암암리에 사주한 대원군이었다.
    아비가 아니라 악귀였다. 무섭고 치욕스러웠다.
    "전하!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잡으십시오. 잡된 무리에 마음을 쏟지 마시옵소서. 더 크고 강한 적은 밖에 있지 않사옵니까. 승냥이들이 조선을 향해 달려오고 있사옵니다. 어렵더라도 쓸개를 씹으며 하루빨리 나라를 강하게 세워야 하옵니다."
    왕비는 지아비의 찢어진 가슴을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왕이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대원군이 또다시 발목을 잡은 것이다.


    "어찌 그리 얼굴이 환하신지요?"
    강 상궁은 김옥균을 보자 반가움과 설레임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필시 나를 만나서 그럴 거야.’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이 났다.
    "전하의 총애를 받으니 신이 나지 않겠소?"
    "아 예…."
    강 상궁의 올라간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앞으로도 중전마마에 대해 자주 상세히 알려주시오. 중전마마의 일거수 일투족이 중요하오."
    김옥균이 강 상궁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전부터 궁금하온데 어찌 중전마마에 대해 그리 관심이 많으신지요?"
    "이젠 서로 마음을 터놓을 때도 됐으니 말하리다. 실은 나와 금릉위, 서광범은 ‘충의계(忠義契)’를 결성했소."
    강 상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충의계요?"
    "그렇소. 강 상궁도 우리 충의계의 일원이요!"
    "예? 뭐 뭐라고요?"
    강 상궁의 가슴에 얼음 같은 비수가 꽂혔다.
    "왜 그리 놀라오. 충의계야말로 이 나라를 구할 지사들의 결사요. 그러나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해선 안 되오!"
    "충 충의계요? 제가 왜 충의계이옵니까? 전 몰랐고, 허락한 적도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그리 아시오. 이미 우린 한배를 탄 몸이요!"


    (2부 12화는 2021년 7월 30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2부 (10) 초승달에 찔리다
    그림자 황후 2부 (9) 꽃 선물을 받고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그림자 황후 2부 (7) 강화도 조약과 승려의 요지경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그림자 황후 2부 (5) 강 상궁의 마음을 사로잡다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그림자 황후 2부 (2) 사무라이의 메이지유신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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