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2) 임오군란의 서막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7.30 23:00

    [그림자 황후]

    2부 (12) 임오군란의 서막


    "정녕 가셔야 해요?"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초계와 태웅의 그림자도 벽을 타고 출렁였다.
    초계는 태웅이 김윤식이 이끄는 영선사에 수종(隨從)으로 뽑히자 심란했다.
    김윤식은 개화 성향의 유신환 제자였다가 스승이 타계하자 박규수의 문하로 옮긴 개화론자였다.
    왕비의 아버지인 민치록은 유신환과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민태호는 김윤식과 함께 유신환의 제자였다. 왕비는 가풍의 영향을 받아 개화에 열린 마음을 가졌고, 왕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민씨 척족의 구심점이 된 민태호는 김윤식을 후원했던 것이다.


    태웅은 한어를 잘하고 상해 유학 당시 이홍장이 이끌던 양무운동을 보았기 때문에 영선사에 뽑혔다.
    이홍장은 서태후의 신임 아래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을 맡아 청의 외교통상과 군을 책임지는 막강한 실세로 떠올랐다.
    이홍장은 왕에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계략이 있으니 국방을 강화하고, 각국과 조약을 맺으라고 재촉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영선사 유학생으로 38명을 뽑았는데 중인(中人) 이상 20명은 학도(學徒)라 하여 이론을, 나머지 18명은 공장(工匠)이라 하여 기술을 익히게 했다. 이들은 천진 기기국에서 탄약제조법과 화학·제련·기초기계학 외국어를 배울 계획이었다.


    태웅은 청국의 인맥을 총동원하라는 왕비의 명을 받자, 이홍장 막료의 딸들인 양옥기와 옥주를 떠올렸다.
    "어여쁜 미인을 두고 가려니 내키질 않소."
    태웅이 초계의 투명한 입술을 손으로 슬쩍 건드렸다.
    "아이 참 도련님도."
    초계가 태웅의 품에 안기며 얼굴을 묻었다.
    상해에 도착한 태웅은 10여 년 만에 너무나 변한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엇보다 전신 시설이 설치돼 광동에서 벌어진 일도 북경에서 곧바로 알수 있다는 게 놀라고 부러웠다.
    ‘한양 소식이 궁금해도 편지로 받아야 하니 얼마나 답답한가!’


    중전마마를 뵙고 온 초계는 솟을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자를 발견했다.
    삿갓을 들어 올리자 달수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 여긴 어찌 알고!"
    달수의 시원한 눈과 짙은 눈썹, 높고 곧은 코가 혹할 만큼 수려했다. 사내다움에 진중함이 더해져 마음을 뺏길 만했다.
    "냉수 한 그릇 얻어 마시자."
    초계는 태웅이 없는 집에 달수를 들이는 것이 걸렸지만 결국 문을 열었다.
    "나으리가 아시면 곤란하니 빨리 가."
    초계는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나으리? 그려…오지 말아야 하는디 와 버렸다."
    달수의 목소리가 풀이 죽자 초계의 마음이 흔들렸다.
    "밤에 잘 데는 있어?"
    "외사촌이 왕십리에 살아. 그리 가야지."


    달수가 벌떡 일어섰다.
    "초계야 내가 널 잊을 수 있을까…."
    등을 돌린 달수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무슨 헛소리야!"
    "난 평생 너만 그리워하며 살 거 같다. 그게 너무 징그럽다 초계야."
    달수의 짙고 커다란 눈이 그렁그렁했다.
    "스승님이 글을 익히라 하셔서 이 돌대가리가 죽어라 글을 배웠다. 사실은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였어. 근데 여우에 홀리는지 너만 보면 맴에도 없는 소리가 튀어나와. 그래놓고는 얼매나 가슴을 쥐어뜯는지."
    "그만해!"
    초계가 바닥에 엎어지며 귀를 막았다.
    달수의 놀란 눈이 초계를 허둥지둥 더듬었다.
    툭.
    그리고 달수의 눈물이 떨어졌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자 굳게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렸다.
    두 사람의 깊고 은밀한 곳이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강 상궁 어디 아픈가? 종일 얼굴에 핏기 하나 없네."
    "황공하옵니다 마마! 아니옵니다."
    "이거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야 요긴하게 쓰게."
    "마마! 이건 단계연(端溪硯)이 아니옵니까! 어찌 이리 귀한 걸 내려주시는지요. 거두어주시옵소서!"
    "앞으로 더 갈고 닦아서 신필(神筆)이 되어보게. 사내로 태어났으면 조선을 호령했을 명필인데 아까워. 내가 일찍이 감찰상궁을 붙인 건 자네 얼굴을 보니 재색을 겸비해서 경계하라고 그런 걸세. 앞으로 중요한 일을 할테니 더욱 조심하고."
    "마마!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겠사옵니까!"


    일본은 추가 개항을 종용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군함을 끌고 오겠다고 겁박하고 있었다.
    젊은 국왕은 사방에서 죄어오는 위협에 분통이 터지지만 하루 빨리 군사력을 키워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조사시찰단으로 다녀온 홍영식의 <일본육군총제(總制)>를 중전과 함께 읽고 느낀 바가 컸다.
    홍영식은 가장 중요한 일본 육군성을 맡아 육군본부, 육·해군사학교와 포병공창, 육군조련장 등을 방문해 세밀히 조사했다.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은 척사파였지만 아들인 홍영식은 박규수 제자로 개화사상에 빠져있어 몸을 아끼지 않았다.


    "별기군을 창설하라!"
    조선은 청국에 신식 군대를 훈련할 군사교관을 요청했으나 자꾸 지연되자 일본공사관의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에게 훈련을 맡겼다.
    일본 공사가 신식 군대를 거듭 주장하면서 호리모토를 추천한 것이다.
    일본의 무기가 청국보다 우수하고, 청국 교관을 초빙하면 예산과 시간이 많이 들지만 조선에 와 있는 호리모토를 기용할 경우 이를 줄일 수 있었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한복과 양복을 절충해서 만든 검정 군복을 입었다. 바지는 한복같이 통이 넓었고 상의는 짧게 해서 끈으로 묶었다.
    모자는 검은 모직으로 만들어 상투 위에 얹고 턱밑에서 끈으로 묶었다.
    "기오쓰게!"
    호리모토가 ‘기오쓰게’를 외치면 통역관이 옆에서 외쳤다.
    "기착(氣着·차렷)!"
    "가케아시!"
    다시 통역관이 조선말로 외쳤다.
    "뛰어가!"
    별기군이 일제히 뛰어가자 교련장에는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행진에 발도 안 맞고 총대를 메는 것도 제각각이었지만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별기군은 수가 늘어 병졸 300여 명, 사관생도 140여 명이 훈련을 받게 됐다.


    별기군이 훈련장 밖으로 나와 훈련을 받으면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에잇 퉷! 오랑캐 앞잡이 놈들!"
    훈련도감 군졸들은 별기군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자신들은 13개월째 봉록미가 밀려있는데 별기군은 자신들보다 배 이상 받으며 거르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5군영이 무위영과 장어영, 2개영으로 개편되면서 군졸들이 잘려나갔다.
    남은 자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1882년 7월 19일.
    봄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땅이 버썩 마르고 날은 타는 듯 뜨거웠다.
    전라도에서 쌀 실은 배가 들어왔고, 훈련도감 군졸들은 도봉소로 봉록미를 받으러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러나 쌀을 받아 얼른 열어본 군졸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2부 13화는 2021년 8월 6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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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그림자 황후 2부 (7) 강화도 조약과 승려의 요지경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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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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