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3) 욕망의 나르시시즘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8.06 23:00

    [그림자 황후]

    2부 (13) 욕망의 나르시시즘


    1882년 7월 19일.
    "이 죽일 놈들!"
    숭례문 근처 선혜청 창고에서 쌀을 받아든 김춘영이 고함을 질렀다.
    쌀이 반쯤 썩어 잿빛이었고 겨와 돌까지 섞여 있었다.
    "이걸 사람 새끼가 먹으라고 주는 거여!"
    유복만이 눈알을 부라리며 창고지기를 홱 노려보았다.
    훈련도감 군병들은 화가 치밀었다.
    "왜 받기 싫으냐? 처먹기 싫으면 도로 내놔."
    봉록미를 해먹은 선혜청 창고지기가 이죽거렸다.
    "뭐야? 이놈이!"
    김춘영과 정의길, 유복만, 강명준이 달려들어 창고지기를 패기 시작했다.
    "아이쿠! 내가 누군줄 알고!"
    "그만들 하쇼! 이러다 사람 잡것소!"
    훈국병(훈련도감 군병)인 사촌을 따라왔던 달수가 겨우 뜯어말리자 창고지기가 달아났다.
    달수는 불길한 예감에 몸이 떨렸다.
    다음날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내막을 조사하지도 않고 김춘영 유복만 등 4명을 잡아들였다.


    "큰일 났어요! 춘영이 형님하고 우리 형하고 다 잡아 죽인대요!"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에게 유복만의 동생 춘만이 달려왔다.
    "통문을 돌려서 사람들을 모으자!"
    왕십리에서 살던 김장손과 유춘만은 동별영(인의동)에 모이자는 통문을 돌렸다.
    훈국병들은 왕십리에 주로 살면서 부족한 녹봉을 채우기 위해 좌판 장사를 했다.
    훈국병 중에는 동임(洞任)이 많아 동네에서도 영향력이 있었다.
    특히 잡힌 자들은 50명 이상을 지휘하는 기총(旗摠)급이어서 군병들의 충격이 컸다.
    동민들도 따라 나섰다. 흉년인데다 일본이 조선 쌀을 쓸어가면서 쌀값이 무섭게 뛰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밀려오는 일본 상품 때문에 자신들이 내다 파는 물건은 팔리지 않았다.
    민 씨들이 일본 오랑캐를 끌어들이고, 탐학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무리하게 지으면서 당백전을 남발하고 청전(淸錢)을 유통시키면서 재정은 곪아 있었다. 탐학하는 관리들의 오랜 비리는 근절되지 못했다.
    반면 개화를 추진하면서 청과 일본으로 유학생 파견과 새로운 기구를 신설하면서 많은 재원이 필요했다. 그 여파가 훈국병들의 급료 문제에까지 나타난 것이다.


    군병과 동민 수십 명이 훈련도감 본영인 동별영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상관인 무위소대장 이경하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이경하는 대원군 집권 시 신임을 받아 천주교 박해 때 혹독한 고문으로 유명해 ‘낙동 염라대왕’이란 별명이 붙었던 자다.
    "이 사람들아 나는 요즘 힘이 없네. 내 자네들 사정을 편지로 써줄 테니 민 대감을 직접 찾아가 보게."
    민겸호는 폭발사고로 타계한 민승호의 동생으로, 별기군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민씨 척족의 실세가 되어 쌀을 담당하는 선혜청 당상을 맡고 있었다.
    김장손과 유춘만 등은 민겸호 집으로 몰려갔다.


    탕탕탕-
    "민 대감을 뵈러 왔소!"
    "대궐에 가고 안 계신다! 이놈들 혼나기 전에 썩 물러가거라!"
    도봉소에서 쌀을 나눠주다 두들겨 맞은 창고지기가 아닌가. 창고지기는 하인들과 지붕에 올라 군병들에게 돌을 던지며 분풀이를 했다.
    군병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 창고지기와 하인들을 잡아 죽였다.
    세도가인 민겸호의 하인들까지 죽인 이들은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장어영 군병까지 가세해 수백 명으로 수가 불어나자 과격해졌다.
    "운현궁으로 가자!"


    "무슨 일이냐!"
    대원군은 운현궁으로 몰려든 무리를 보고 소리쳤다.
    "억울한 소인들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대원위 대감!"
    "다들 물러가라!"
    대원군은 호통을 친 뒤 아소당(我笑堂)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대원군은 김장손과 유춘만을 내실로 은밀히 불러 밀담을 나눴다.
    대원군은 가인(家人)인 허욱에게 군복으로 갈아입고 칼을 쥔 뒤 군병들을 지휘하게 했다.
    "대감께서는 너희들 편이시다. 다들 진정하고 대오를 정렬한 뒤 하명을 따르라!"


    대원군의 얼굴은 희열로 광채가 나고 몸은 기쁨으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꿈에 그리던 순간이 온 것이다.
    9년간 맛본 배신감과 모멸감을 생각하면 놈들의 쓸개를 씹어도 시원치 않았다.
    난병들이 민 씨 놈들을 쳐죽일 것이다.
    괴수인 중전까지.
    이 순간을 위해 혀를 깨물며 송장처럼 죽은 듯 살아왔다.
    "으하하핫."
    대원군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입은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대원군을 만난 군병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무기고가 있는 동별영으로 몰려가 조총과 창, 칼을 탈취한 뒤 어영청 무기고까지 열어 무장을 강화했다.
    우발적 사고가 정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왕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무위대장 이경하를 파직하고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을 무위대장에 명했다.
    이경하를 급히 군병들에게 보내 설득시켰으나, 오히려 군병들에게 쫓겨났다.
    군병들은 국왕와 직속 상관의 명령을 무시한 난병(亂兵)으로 돌변한 것이다.
    별기군까지 난병에 합류하면서 이들을 제압할 군병이 없었다.


    제1대는 종로로 뛰어가 포도청을 습격해 수감 중인 김춘영과 유복만을 꺼냈다.
    제2대는 별기군의 훈련장인 하도감으로 몰려가 교관 호리모토와 일본인들을 죽였다.
    제3대는 경기감사인 김보현을 찾기 위해 서대문 부근 경기감영을 습격했지만 찾지 못하자 창고에서 무기를 탈취했다. 김보현은 민씨 일파가 되어 선혜청 당상을 지낸 인물이었다.
    "우린 그만 돌아가자."
    달수가 사촌에게 속삭였다. 난폭해지는 난병들 때문에 초계가 걱정돼 몸이 달았다.
    "놈들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고 하셨구먼!"
    싸움과 살생을 훈련받은 자들의 살기는 무시무시했다.


    "왜놈들을 쓸어버리자!"
    어두워지자 난병들은 부근에 있는 일본공사관으로 몰려갔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공사관이 포위되자 탈출을 결심했다.
    "기밀문서는 모두 태우고 이곳을 빠져 나간다! 모두 대오를 흐트러뜨리지 말라!"
    일본인들은 기밀문서를 서둘러 태우고 공사관에도 불을 질렀다.
    하나부사가 먼저 문을 박차고 나오고 28명이 거총 자세로 일제히 남대문을 향해 뛰었다.
    우르릉 쾅!
    천둥 번개가 치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2부 14화는 2021년 8월 13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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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그림자 황후 2부 (7) 강화도 조약과 승려의 요지경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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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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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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