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4) 시신 없는 관 앞에서 울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8.13 23:00

    [그림자 황후]

    2부 (14) 시신 없는 관 앞에서 울다


    1882년 7월 24일.
    뜬눈으로 지샌 왕비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무기를 탈취하고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고? 대원군이다! 군란의 배후는 대원군이야!’
    지난해 대원군은 서자 이재선을 내세워 역모를 꾸몄다. 왕을 폐위하고 무기를 탈취해 일본공사관을 습격한다는 역모였다.
    지금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들인 주상을 죽이기 위해 대궐에 폭탄을 터뜨리고, 친정 오라버니와 어머니를 폭약으로 죽인 늙은이.
    한쪽이 숨이 끊어져야 끝이 날 전쟁이었다.
    ‘자객이라도 보내 더러운 탐욕에 칼을 꽂아야 하는가? 전하의 이름을 욕보일 수는 없어! 자신의 업보를 지고 영원히 기억되게 하리라!’
    "전하, 대원군을 부르시옵소서."
    왕비의 까칠해진 목소리가 침전을 울렸다.
    왕은 충혈된 눈으로 힘없이 왕비를 쳐다보았다.
    "중전!"
    "지금 당장 이길 수 없다면 일단 뒤로 물러나시옵소서. 다시 기회를 잡아야 하옵니다."


    "가자!"
    난군들은 민씨 일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영의정을 지낸 대원군의 친형 이최응을 무자비하게 참한 뒤 창덕궁으로 향했다.
    난군들이 돈화문을 향해 쏘아대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갔다.
    왕은 친형이자 무위대장인 이재면을 다급히 대원군에게 보내 입궐을 명했다.
    난군들은 시퍼런 칼과 창으로 대궐 기둥과 난간을 쳐대며 무서운 굉음을 냈다.
    "마마 어서 피하시옵소서! 난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중궁전의 지밀상궁이 외쳤다.
    "마마 제 옷으로 갈아입으시옵소서!"
    이때 강 상궁이 나와 자신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강 상궁 어찌 이러나!"
    "마마 시간이 없사옵니다. 어서 서두르시옵소서!"
    왕비는 강 상궁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강 상궁은 왕비가 궁녀들과 빠져나가자 앞가르마에 달았던 개구리첩지를 빼 소매 안에 감추었다.
    ‘마마 부디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대원군은 난군을 지휘 중인 허욱을 불러 자신이 입궐할 때 호위하도록 했다.
    부대부인 민씨도 4인교를 타고 남편인 대원군을 따라나섰다.
    ‘제발 중전과 겸호가 무사하도록 비옵니다!’
    민씨는 가마 안에서 몰래 성호를 그었다.
    동생 승호를 죽인 대원군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민씨는 궁녀들 틈에 섞여서 나오고 있는 왕비를 발견했다.
    "얼른 가마에 모시어라!"
    왕비는 시어머니를 보자 입술을 깨물며 가마에 올랐다.
    "멈춰라!"
    왕비를 태운 가마가 급히 빠져나오는데 칼을 든 난군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서너 명이 둘러싸고 가마를 발로 차 쓰러뜨렸다.
    "악!"
    한 명이 왕비의 손목을 비틀어 끌어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붉은색 군복을 입은 자가 나타나 소리쳤다.
    무예별감 홍재희(홍계훈)였다. 건장하고 늠름하게 생긴 자였다.
    "누구냐?"
    "별감도 몰라보는가! 이는 내 누이 홍 상궁이다. 몸이 좋지 않아 데려가려고 왔더니 이게 무슨 꼴인가!"
    "누이라고?"
    홍재희는 난군들이 멈칫하는 사이 왕비를 둘러업고 궁을 빠져나갔다.


    민겸호와 대신들은 대전 앞까지 밀고 들어온 난군에 속수무책이었다.
    "내놓으시오! 내놓으시오!"
    난군들이 칼과 창을 두드리며 떠나갈 듯 소리쳤다.
    "민 대감의 일이니 나가서 소임을 다하시오."
    왕을 알현하고 나온 대원군이 민겸호를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민겸호와 민씨 척족을 몰살시키면 재황이(고종)는 발톱 빠진 매야. 괴수인 중전마저 죽이면 재황이의 날개를 뜯어내는 것이니 이제 내 세상이 아닌가!’
    대원군은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대원위 대감! 매형! 제발 살려주시오!"
    민겸호가 대원군의 옷을 붙들며 애원했다.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러시오."
    민겸호가 떠밀리듯 층계를 내려가자 난군들이 달려들었다.


    별전(別殿)에 있던 왕에게는 내관 두 명과 조영하, 김병시만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칼과 창을 든 난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김병시가 왕을 업고, 조영하가 뒤를 호위하며 나왔다.
    한 명이 칼을 들고 막아서자, 김병시를 알아본 난군이 이를 말렸다.
    "저분은 승동 대감이시다. 죄가 없으니 해쳐선 안 된다."
    서둘러 빠져 나온 왕은 뜰에서 뭔가 활활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저것이 무엇인가?"
    "황송하옵니다. 전하께서 애써 모으신 양서(洋書)들인 줄 아옵니다."
    산더미같이 쌓인 양서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부국강병을 꿈꾸며 어렵게 사 모은 양서들이었다.
    "전하께서 아끼시던 양창(총)과 대포도 불타고 있사옵니다!"
    왕은 눈의 초점을 잃었고 정신은 연기를 따라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악몽을 꾸고 있었다.


    난군들은 민영익 등 민씨 척족의 집으로 몰려가 죄다 부수고, 수상한 자를 보면 처단했다.
    거리에는 시신들이 널리고 악취가 진동했다.
    초계는 민태웅의 집에 남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드디어 난군 몇 명이 들이닥쳤다.
    "민가 놈은 어디 있느냐?"
    "지금 여기에 없소. 멀리 청국에 갔소."
    "뭐라? 거짓말이지?"
    "민가 놈의 첩인가 본데. 우리도 맛 좀 볼까?"
    한 명이 초계를 넘어뜨린 뒤 치마를 쫙 찢었다.
    "뭐여!"
    총을 든 달수가 나타나 치마를 찢은 자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었다.
    "누구냐!"
    달수가 목에 건 군패(軍牌)를 까 보였다.
    "운현궁 서 포수를 모르더냐? 이 여자는 민가 놈 삯바느질하는 내 처구먼!"
    "퉷! 운현궁?"
    난군들은 운현궁이란 말에 주춤했다.
    "나루터로 가자! 쥐새끼 한 마리도 도망치지 못하게 막으라는 명령이다."
    달수는 난군들이 사라지자 사촌이 빌려준 군패를 숨겼다.
    "초계야 어서 도망가자."
    "안돼 마마가 찾으실지 몰라."
    "아직도 마마 타령이냐? 중전은 죽었다고!"


    대원군은 그날로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개편된 2영(營)을 훈련도감 등 종전의 5영 체제로 되돌렸다. 이재면은 공조판서와 선혜청 당상으로 명했다.
    대원군은 피에 굶주린 난군들을 달래야 했다.
    "중전이 승하했음을 선포하라!"
    난군들이 궐에 난입한 당일 국상 선포를 지시한 것이다.
    영의정 홍순목과 판중추부사 김병국이 울면서 반대하고 예조와 홍문관에서도 반대했다.
    "경들은 입 다물라!"
    대원군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2부 15화는 2021년 8월 20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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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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