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5) 김옥균 후쿠자와를 찾아가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8.20 23:18 | 수정 2021.09.26 14:49

    [그림자 황후]

    2부 (15) 김옥균 후쿠자와를 찾아가다


    "외무성의 나가노 교타로입니다. 일본에 계실 동안 통역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김옥균올시다."
    김옥균은 어윤중이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자신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왕의 내밀한 허락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바로 이것이야! 조선이 나아갈 길이 바로 이거야!’
    김옥균은 나가사키의 조선소와 제련소를 둘러보며 흥분했다.
    오사카의 군수공장과 조폐국을 보며 메이지 유신의 성과를 실감했다.
    도쿄는 말로만 듣던 서구의 모습을 보여줬다. 사내들은 존마게(일본 상투)를 자르고, 양복 차림으로 깨끗한 길을 활보했다.
    여인들은 옥 같은 피부에 비단옷을 걸치고 머리를 멋지게 올려 한 송이 꽃 같았다.
    도쿄에 밤이 내리자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가스등이 켜졌다.
    김옥균은 당장 조선을 일본처럼 만들고 싶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조선의 거물로 환대받자 하늘 위를 걷는 듯했다.
    일본 <도쿄니치니치신문>에서 ‘조선 개화당 수령 김옥균 씨가 일본을 찾았다’고 보도했던 것이다.
    김옥균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는 유럽에서 1년을 머물고 미국을 두 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서구 사정에 밝았다.
    후쿠자와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쉽게 쓴 <서양사정>은 엄청나게 팔리면서 문명개화에 대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후쿠자와는 <문명론의 개략>을 쓰면서 ‘Civilization’을 ‘문명개화’로 번역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근대인을 양성한다며 게이오의숙(게이오대학)을 세우고, 1882년에는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해 여론을 주도했다.


    "잘 오셨소 김옥균 선생!"
    후쿠자와가 도쿄 자신의 집을 찾은 김옥균의 손을 잡았다.
    후쿠자와는 일본인 치고 키가 크고 건장했는데 특히 인중이 길고 깊었다. 녹색 유카타 위에 검정 하오리를 입고, 흰색 타비(엄지발가락을 가르는 일본 양말)에 조리를 신고 있었다.
    후쿠자와의 아내 긴(錦)이 직접 나와 차를 내왔다.
    "조선의 대 정치가가 찾아와줘서 큰 영광입니다."
    김옥균은 후쿠자와의 겸손함에 놀라고 자신을 알아주자 자신감이 생겼다.
    "옛날부터 일본은 조선에서 문명을 받아들였지요. 문자와 유학·불교·의학·역법·공예까지 일본으로 건너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조선은 ‘일본 문명의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최근 뒤처지고 있는 조선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김옥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때문에 후쿠자와 선생에게 조언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조선도 일본처럼 서구 문명을 활발히 받아들여 발전해야 합니다!"
    "김옥균 선생은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 잘 오셨습니다! 일본의 앞선 경험을 나누면 조선도 문명개화할 수 있습니다. 김옥균 선생 같은 분이 앞장서면 가능합니다!"
    김옥균은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전하께서 날 신임하시고 후쿠자와 선생이 전폭적으로 도와주면 뭐든 할 수 있어! 이제 나 김옥균이 조선을 개혁하리라!’
    김옥균은 여섯 살인 자신을 김병기에게 양자로 보낸 고향의 가난한 아버지가 떠올랐다.
    지난날이 떠오르자 목구멍이 뜨거웠다.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보며 혀로 뜨거운 차를 굴렸다.
    ‘조선은 황금의 땅이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 불만인 일본인은 조선으로 보내면 된다. 사회 불만 세력을 조선으로 실어나르고, 일본인은 시장을 개척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후쿠자와의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처럼 메이지 유신에 칼을 꽂지 않아 권력 분점에 끼지 못했다. 그러나 개혁을 꿈꾸는 김옥균을 통해 조선에서 대리 만족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옥균은 후쿠자와와 일본 외무성의 도움으로 흥아회(興亞會) 같이 일본 정계와 재야인사를 두루 만났다.
    "후쿠자와 선생께서 도와주셔서 이번 방문이 참으로 보람됩니다."
    김옥균은 기대 이상의 도움을 주는 후쿠자와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조선의 선각자를 만났으니 당연히 도와야지요. 참 이동인 씨 소식은 유감입니다."
    김옥균과 승려 이동인은 개화의 꿈을 나눈 동지였다. 김옥균은 이동인과 십여 일을 같이 기거하며 일본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메이지 유신에 관심이 많았던 이동인은 부산에 진출한 일본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별원을 드나들며 일본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러나 히가시혼간지가 부산에 별원을 낸 것은 포교와 함께 조선의 유력자들과 친분을 쌓아 친일 인사로 만드는 데 있었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순금을 마련해 이동인의 일본 밀항 자금으로 건넸다. 일본에서 외국 사절들과 교분을 쌓고 정보를 모아보라는 목적이었다.
    김홍집이 수신사로 도쿄를 방문했을 때 현지에서 활동중이던 이동인을 만났고, 이후 민영익에게 소개했다. 민영익의 천거로 이동인은 왕을 알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동인은 군함을 극비리에 구매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1881년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어이 나가노!"
    나가노 교타로는 김옥균과 헤어진 뒤 한잔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때 <도쿄니치니치신문>의 니시무라가 나타났다.
    "자네 조선의 거물 김옥균과 다닌다더군."
    김옥균은 이미 일본에서 유명인물이 되어 있었다.
    "친구 사이에 특종 하나만 주게. 우선 한 잔씩 하지."

    나가노는 샤미센을 연주하는 예기(藝妓)의 희고 긴 흰 손가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샤미센의 흐느끼는 소리가 몸을 휘감으며 긴장을 풀어헤쳤다.
    "후쿠자와가 김옥균과 무슨 얘기를 했나?"
    "쉿!"
    "이렇게 말했겠지. 국가가 문명개화를 하는 데에는 구미형과 일본형이 있소. 구미형은 200~300년에 걸쳐 이뤄졌지만 우리 일본은 한 세대 만에 해냈소. 조선도 늦게 시작했으니 일본형을 따르는 게 좋을 것이오."
    나가노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예기의 목선을 따라가다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후쿠자와의 기만술이 잘 먹히던가? 우리끼리 말이지만 일본은 200년 전에 벌써 남만(南蠻· 스페인, 포르투갈)에 개항한 거 아닌가. 한 세대 만에 성공한 게 아니지."
    서른두 살의 김옥균은 자신만만하고 거침이 없었다.
    마흔여덟 살의 후쿠자와는 노회했다.


    나가노는 허겁지겁 김옥균에게 뛰어왔다.
    일본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때였다.
    "김옥균 선생 큰일 났습니다! 조선에서 군란이 일어나 왕비가 승하하시고 일본 공사관도 타버렸답니다!"
    "악! 어떻게 이런 일이!"
    김옥균의 목구멍에서 처절한 비명이 솟구쳤다.


    (2부 16화는 2021년 8월 27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2부 (14) 시신 없는 관 앞에서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13) 욕망의 나르시시즘
    그림자 황후 2부 (12) 임오군란의 서막
    그림자 황후 2부 (11) 청룡(靑龍)이 나르샤
    그림자 황후 2부 (10) 초승달에 찔리다
    그림자 황후 2부 (9) 꽃 선물을 받고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그림자 황후 2부 (7) 강화도 조약과 승려의 요지경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그림자 황후 2부 (5) 강 상궁의 마음을 사로잡다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그림자 황후 2부 (2) 사무라이의 메이지유신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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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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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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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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