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7) 대원군 납치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9.03 23:00

    [그림자 황후]

    2부 (17) 대원군 납치


    청진의 주복(周馥) 해관도는 영선사 김윤식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임오군란 소식을 들은 김윤식은 어윤중과 대책을 고민하며 밤을 지샜다.
    김윤식은 어윤중보다 열세 살이나 많았지만 부국강병에 대한 집념으로 속마음을 나눈 사이였다. 어윤중은 왕명을 받고 청에 머물고 있었다.
    어윤중은 일본의 문물을 살피기 위해 파견된 조사시찰단을 이끈 장본인이었다.
    척사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젊고 유능한 관료들로 구성된 조사들은 부랑자 같이 남루한 차림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척사파가 연루된 이재선(대원군의 서자) 역모 사건 같이 왕권을 위협하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윤중은 생명의 위험과 모멸감을 견디며 희망을 가졌던 시간을 떠올리자 북받쳤다.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 군란에 대해 탐문 할까 합니다."
    주복은 김윤식을 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난당들이 일시적으로 저지른 게 아닙니다. 작년에……이재선 역모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도 일본인을 죽이려 했습니다. 지금 일어난 변란은 작년 사건과 일치합니다."
    김윤식은 주복의 목에 걸린 기다란 조주(朝珠)를 바라보았다.
    "일본이 이번 일을 트집 잡는다면 국면은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병선을 하루빨리 급파해 우선 난을 평정해야 합니다."
    "살해된 대신 중에 조약체결을 담당했던 사람이 있는가요?"
    "중전마마는 다른 나라와의 외교를 강력하게 주장하다 먼저 화를 입은 것입니다. 궁중에서는 밤이 깊어도 등불을 끄지 못한 지 9년이나 되었습니다. 폭발 사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전마마는 불안하여 무당들이 축원하는 걸 일삼고, 신하들을 복종하게 하려고 상을 많이 내려 원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원군에게 화를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보호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본은 하나부사 공사를 전권위원으로 명해 군함과 함께 조선으로 출동시켰다.
    육군성은 구마모토 진대의 1개 대대를, 해군성에서는 정예함 금강·비예·청휘·일진호가 출진했다.
    귀국길에 올랐던 김옥균은 군란 소식을 듣고 일본군 배에 함께 올라탔다.
    청국의 군함 3척과 상선 2척도 조선에 도착했다.
    청국 배에는 김윤식과 어윤중이 타고 있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와 부국강병을 염원하며 공부했던 김옥균은 일본 배에, 김윤식은 청국 배를 타고 들어온 것이다.


    일본군 군화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하나부사가 조선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500명을 이끌고 한성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창검을 치켜들고 칼같이 대오를 지키며 입경하는 일본군을 보자 소름이 끼쳤다.
    일본군대가 창덕궁 바로 앞까지 들이닥치자 모두가 경악했다.
    하나부사는 돈화문을 거쳐 중희당까지 직행했다.
    "먼 길에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오."
    왕은 침착하려 애쓰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나부사는 몇 마디 얼버무린 뒤 안주머니에서 거액의 배상금 요구를 포함한 협상안을 올렸다.
    외교적 의례나 격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국왕에게 직접 문서를 올리는 엄청난 무례를 범했다.
    왕은 숨을 가다듬은 뒤 영의정에게 잠시 물어본 뒤 문서를 받았다.
    "3일 안으로 답을 주시기 바라옵니다 전하."


    3000명에 가까운 청국군이 소총을 곧추세우고 수십 개의 깃발을 휘날리며 입경했다.
    청국군대가 일으키는 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군대의 피리 소리가 귀를 찢듯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청국군은 총사령부를 동대문 밖 동묘에 설치하고, 오장경 제독의 본대는 별기군의 훈련장소였던 하도감(동대문운동장 서쪽)에 차렸다.
    총병 오조유는 동별영(서울대병원 서쪽), 총병 황사림은 청파, 장광전은 남소영(장충단공원)에 각각 진을 쳤다.
    하나부사는 청군이 민첩하게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한성을 요새화하자 새파랗게 질렸다.


    이홍장은 군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게 미국, 영국과 조약을 맺도록 했다.
    일본이 조선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게 해 독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특히 이홍장은 영국공사가 "청국이 조선을 잃어버리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슈펠트 제독도 비슷한 말을 흘렸다.
    영국과 미국에게 일본은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강국인 러시아가 조선의 영흥만이나 부산항을 얻어 해양대국의 발판을 강화하면 큰일이라고 판단했다.
    이홍장도 대만이나 베트남은 포기해도 조선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을 열강에게 뺏길 경우 북경까지 위태롭다고 우려한 것이다.


    하나부사는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의 지시에 따라 대원군을 만났다.
    이노우에는 ‘나중에 대원군과 협력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관계를 잘 유지하라’는 특별지령을 내렸다.
    창덕궁에 연현문(延賢門)을 지나면 대원군이 정무를 보고 있는 처소가 있었다.
    대원군은 일본이 요구한 거액의 배상금과 조건들이 터무니없다며 거부했다.
    일본군보다 더 많은 수의 청국군이 입경한 것을 염두에 둔 대응이었다.
    그러나 청국으로선 대원군이 열강과의 관계를 포함해 문제의 인물이었다.
    이홍장의 막료인 마건충과 오장경은 운현궁을 예방한 뒤 대원군을 군영으로 초대했다.
    대원군이 청국 군영으로 갈 준비를 하자 측근인 정현덕이 말렸다.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하니 가지 마십시오!"
    "걱정할 것 없다."


    마건충은 군영으로 온 대원군과 2시간 넘게 필담을 나눈 뒤 연회를 시작했다.
    풍성하게 차린 요리에 술잔이 채워졌다.
    "국태공(대원군)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옵니다!"
    모두가 잔을 높이 들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고 100명이 넘는 건장한 청국 군병이 번개같이 들어왔다.
    군병들은 대원군을 양쪽에서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청국병은 대원군을 가마에 태운 뒤 쉬지 않고 달려 남양에 대기하고 있던 군함에 태웠다.


    홍계훈은 난군들의 시퍼런 칼날 속에 왕비를 업고 빠져나와 윤태준의 집으로 숨었다.
    극비리에 평양 관찰사를 지낸 민영위에게 왕비의 행방을 알렸다.
    민영위는 은밀히 왕비를 벽동 민응식의 집으로 모신 뒤, 방 앞에 엎드려 밤새 지켰다.
    위험이 계속되자 여주를 거쳐 충주로 피했다.
    왕비는 고운 다리에 피고름이 나고 급기야 턱이 딱딱 부딪치는 오한과 고열에 시달렸다.
    "내- 내 몸이 어찌 이러느냐! 턍약은 준비됐느냐!"
    왕비가 오한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민응식이 눈물을 뿌리며 다급히 말했다.
    "중전마마 황공하옵니다! 학질이신 듯하옵니다!"

    (2부 18화는 2021년 9월 10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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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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