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8) 아사달의 성모처럼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9.10 23:00

    [그림자 황후]

    2부 (18) 아사달의 성모처럼


    "전하가 기다리신다! 나가야 해! 세자는 어디 있느냐!"
    사방에서 불이 활활 거리고, 난군들이 도끼로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이놈들! 감히 어디라고!"
    왕비는 고열과 악몽에 사지가 뒤틀렸다.
    초계가 몸부림치는 왕비를 필사적으로 안았다.
    "악! 어딜 손 대느냐!"
    "마마 초계이옵니다!"
    왕비의 손톱이 초계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초계를 팽개치고 문고리를 잡아 뜯던 왕비가 기절해 정신을 잃었다.


    부연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났다.
    사방은 자욱한 안개에 휩싸이고, 두 개의 해가 음산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경(王京·경주)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아낙들은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하늘의 기운을 읽은 일관(日官)이 왕에게 아뢰었다.
    "인연이 있는 승려를 찾아 산화 공덕을 해야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왕은 높은 누각에 올라 한 명을 지목했다.


    "이름이 무엇인가?"
    "월명이라고 하옵니다."
    월명의 갸름한 얼굴은 옥처럼 깨끗하고 빛이 났다.
    투명한 피부에 먹줄로 그은 듯 곧은 코와 가지런한 눈썹, 붉은 입술을 가졌다.
    몸에서는 그윽한 향이 흘렀고, 몸짓은 학처럼 우아했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으니 하늘을 감복시켜 보라."
    "저는 국선(國仙)의 무리옵니다. 향가는 알지만 범패는 모르옵니다."
    "나라의 사정이 급한데 향가면 어떠한가."


    월명은 높이 쌓은 제단에 올라 삼매에 들어갔다.
    휘이익-
    월명이 묘한 소리를 내자 나무들이 흔들리고 구름과 바람이 휘몰아쳤다.
    투명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기이한 소리였다.
    영기(靈氣)를 담은 소(嘯)였다.
    월명은 이어 향가를 불렀다.
    천만 개의 향을 사르듯 사방에 그윽한 향이 감돌았다.
    드디어 하늘이 개이고 기이한 현상이 사라졌다.
    월명은 왕비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꿈이구나.’
    왕비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눈물과 땀, 헝클어진 머리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비단 이불에 누운 왕비가 아니라, 삼으로 지은 이불을 덮은 부인의 모습이었다.
    매산 민영위 집이었다.
    주위는 고요하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꽂히고 있었다.
    먼지만 어지러이 날아올랐다.
    ‘월명사? 월명이 화랑이었구나!’
    왕비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에게 하늘이 암시를 주는 것처럼 느꼈다.
    한줄기 눈물이 주루륵 타고 흘렀다.
    궁궐을 침입하면 3족을 멸하는 중벌을 받았다. 그에 더해 지엄한 왕비를 해하려 했으니 그 죄의 무거움은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나를?’
    난군이 가마를 발로 차 쓰러뜨렸을 때가 생각나자 피가 솟구쳤다.
    ‘왜 나를 해치려 했을까?’
    왕비는 허리가 끊어질 듯 쑤셔 몸을 뒤척였다.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졸고 있던 초계가 왕비를 보며 펑펑 울었다.
    "초계구나…."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밖에 누구냐?"
    왕비는 경계심에 몸을 떨었다.
    "여주 나으리가 밤낮으로 지키고 계시옵니다."


    왕비는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방문 앞을 지켰던 민범호를 들게 했다.
    "중전마마 잘 이겨내셨사옵니다."
    "오랜만이십니다 오라버니."
    민범호는 여흥 민씨 문중에서도 과거를 마다하고 농사를 고집해온 기인이었다.
    그러나 글은 문중에서 누구보다 많이 읽었다.
    왕비는 벼슬을 외면하던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주었다니 특은(特恩)을 내릴 생각이었다.
    "군란은 진정이 됐을까요?"
    왕비가 바짝 마른 입술로 물었다.
    왕비의 눈빛만은 날카롭게 튀었다.
    "황송하옵니다 중전마마, 저들의 죄는 패악무도 하지만…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지금 뭐라 하시었소!"
    왕비는 바닥을 내리치며 민범호를 노려보았다.
    도륙을 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무슨 헛소리인가.
    "중전마마, 옛날에는 성모(聖母)가 나라를 다스렸사옵니다."
    엎드린 민범호의 두 팔이 파르르 떨렸다.
    왕비는 뜬금없는 소리에 눈꼬리를 치켜떴다.
    "무슨 소립니까?"
    "아사달이란 시대가 여자 군주가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신라도 처음에는 성모가 나라를 다스리는 지존이었지만, 왕위 계승이 남자로 바뀐 겁니다. 박혁거세와 알영을 아시지요?"
    "신라의 시조와 그 왕후 아닙니까."
    왕비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민범호는 한쪽에 앉아 있는 초계를 슬쩍 보았다.
    초계는 아들 태웅이와 살림을 차리고 있는 아이였다.
    태웅은 청국에 가 있는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초계는 민범호와 눈이 마주치자 움칠했다. 태웅과 달수가 동시에 떠올라 괴로웠다.


    민범호는 긴장한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삼국유사>를 들여다보면 알영이 왕후가 아니라 왕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사옵니다. 일연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빼버린 사실을 되살렸지만, 승려이다 보니 불교를 덧칠하였사옵니다."
    "여자 군주가 통치했단 말인가요?"
    왕비는 국정에 간여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여자 군주’란 말에 솔깃했다.
    "신라를 오래도록 계림(鷄林)이라 불렀사옵니다. 나라 이름은 바뀌어도 옛 이름은 오래 남는 법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때 ‘고려’라고 했던 것처럼요. 계림의 유래는 알영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나서 붙여진 이름이옵니다. 왕이 태어난 우물이 아니면 국호로 세울 수 없는 것이지요. 일연도 알영이 신라의 왕후가 아니라 왕이었을 것이란 여지를 슬며시 남겨두었사옵니다."


    민범호는 한번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어나갔다.
    "신라 시대 때 월명도 화랑으로 ‘산화가’를 지은 것이옵니다. 그런데 일연은 굳이 승려라고 강조하면서 ‘도솔가’를 지어 두 개의 해를 물리쳤다고 썼사옵니다. 자신의 입장에 맞게 바꾼 것이옵니다."
    왕비는 꿈 속의 ‘월명’을 꺼내자 크게 놀랐다.
    "월명은 선가(仙家)의 ‘사뇌가’로 유명했사옵니다. ‘사뇌가’는 삼매의 심오한 경지를 노래한 것이지요. 선가의 전통이 화랑으로 이어지고 고려까지 이어졌사옵니다. 여흥 민씨 중에 민적이 고려 때 국선(國仙)이었던 건 아시지요? 화랑은 무예와 영적 기운으로 나라를 지킨 신군(神軍)이옵니다."
    "오라버니는 어디서 이런 걸 아셨습니까?"
    "김부식이 없애고자 한 <삼한고기(三韓古記)>와 몇 권을 구해 보았습니다. 황공하오나 중전마마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타고 나신 듯하옵니다."
    왕비는 민범호의 말에 기운이 솟았다.
    ‘국난을 당했으니 하늘의 기운을 빌어 이겨내야 해!’
    "아사달의 성모님은 남자에게 자리를 뺏겼지만 밝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옵니다."
    마지막으로 민범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2부 19화는 2021년 9월 17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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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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