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19) 왕비의 귀환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9.17 23:00

    [그림자 황후]

    2부 (19) 왕비의 귀환


    "초계야!"
    술에 취한 태웅이 상해의 황포강변에 주저앉았다.
    강에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깃발을 단 군함과 상선 수백 척이 숲처럼 버티고 있었다.
    한성의 군란 소식을 들은 태웅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때 마차가 멈춰서더니 남자와 여자가 내렸다.
    여자는 뒤가 볼록한 서양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썼지만 중국인이었다.
    여자가 프록코트를 입은 남자에게 뭐라 하자, 남자는 태웅을 쳐다본 뒤 마차에 올라 사라졌다.
    "태웅 오라버니?"
    태웅은 취한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짙은 눈썹에 광대뼈가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턱은 약간 짧았지만 턱선은 귀여웠고 찢어진 눈매와 얇고 높은 코가 아름다웠다.
    양옥주였다.
    자신이 오래전 청심환을 급히 입에 넣어주어 살렸던 양옥주.
    "옥주?"
    "호호 날 알아보네요."
    "몰라보겠군. 이건 뭐야? 서양 옷을 입고선."
    "아휴 얼마나 마신 거죠? 우선 좀 씻고 옷도 갈아입어요."


    옥주가 데리고 간 저택의 외양은 서양식이지만, 내부는 도자기와 병풍으로 꾸민 중국식이었다.
    옥주는 올렸던 머리를 내리고 푸른색 치파오로 갈아입었다.
    잘록한 허리에 엉덩이가 탱탱했다.
    옥주는 태웅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그거부터 물어보는 걸 보니 나한테 관심 있나 봐요 호호."
    태웅은 말린 무화과 하나를 씹었다.
    옥주가 붉은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아버지가 이중당(이홍장) 선생의 막료인 건 알아요? 아버지가 날 영국으로 보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모스크바로 보냈어요. 거기서 광산을 하는 데밀로프를 만났어요."
    태웅은 러시아놈과 몸을 섞는 옥주를 상상했다.
    "음흉한 러시아놈들!"
    "러시아는 영국도 두려워하는 강대국인걸?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라는 이름은 들어봤어요?"
    "책에서 봤어."
    태웅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일본이 구라파에 시찰단을 보냈다고 소란을 떨지만 표트르 대제는 벌써 1697년에 250명을 보냈어요. 구라파의 문물을 빨리 흡수해서 러시아도 강대국이 되겠다는 욕심을 낸 거죠. 그전까지는 러시아도 못사는 나라였거든요. 표트르 대제는 심지어 자신도 시찰단에 몰래 끼어서 갔다니까."
    "황제가 시찰단에 직접 끼었다고?"
    "재밌는 건 표트르 자신이 네덜란드의 의과학교에 가서 해부하는 것도 보고, 영국 조선소에서는 목수로 일해보기까지 했대요."


    "표트르 대제 이후엔 예카테리나라는 여제가 나타나서 또한번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발전시켰어요. 예카테리나 여제 덕분에 러시아가 영국 다음으로 땅이 제일 넓은 나라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지금 영국도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리네! 중국은 서태후가 다스리고!"
    이때 옥주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인 왕을 폐위한 뒤 살해했고, 서태후도 함께 섭정하던 동태후를 죽였으니 비정하기는 비슷하네요. 그러니 권력을 잡고 휘둘렀겠지만. 둘 다 젊고 잘생긴 종마를 거느리고 몰래 즐겼으니 그것도 비슷하네."
    옥주가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지?"
    "러시아에서 역사와 군사학을 공부했어요. 서양 외교관들의 통역을 해주면서 알게 된 것도 많고. 참 조선도 왕비가 왕보다 더 영민하고 힘이 세다고…."
    "말조심해! 중전마마는 내 고모님이셔!"
    태웅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나오는 듯 했다.
    "아 그래요? 러시아는 영토에 대한 욕심이 끝도 없는 놈들이라 조선도 조심해야 해요."


    옥주가 태웅의 굵은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오라버니-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날 구해준 은인이잖아요."
    옥주의 몸에서 장미 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어쩜 그때 나에게 청심환을 줄 때부터 내 마음을 가져간 지도 몰라. 혀로 녹여서 내 입안으로 넣어줬잖아요."
    옥주의 부드러운 손이 태웅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실 오늘 옥주는 태웅을 보자마자 마음을 뺏겼다.
    데밀로프나 서양인은 그 냄새가 싫었고, 중국 사내는 여자를 대하는 고루함에 질려 버렸다.
    옥주가 태웅의 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조선으로 가지 말고 여기에 남아요. 아님 모스크바나 도쿄로 가든지.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밖에서 봐야 러시아놈이나 일본놈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니까. 일본도 흉측한 놈들이잖아요. 그놈들은 벌써 중국에 수십 명의 첩자들을 보내서 몰래 정보를 모으고 있어요. 내 곁에 있으면 중요한 정보를 많이 알려줄게요."
    태웅의 머릿속이 웅웅 거렸다.
    "하나만 우선 알려줄까? 목인덕(穆麟德)이라는 독일인이 조선에 세워질 해관(海關) 책임자로 파견된다고 해요."
    태웅은 장미 향에 취해 들어갔다. 포도주 잔을 비웠다.
    두 사람의 밤은 깊고 길었다.


    충주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왕비는 은밀히 이용익을 한성으로 보냈다.
    이용익은 충주에서 한성까지 수백 리 길을 하루에 주파하며 왕비의 밀서를 왕에게 올렸다.
    ‘중전이 살아있어!’
    왕비의 친필 편지를 받은 왕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함께 의논하고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던 왕비가 사라지자 왕은 정신이 나간듯했다.
    중전의 존재가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던 것이다.
    왕은 중전을 맞이하기 위해 꽃과 봉황을 조각한 특별 가마를 보냈다.
    청국 군영에서 뽑힌 수백 명의 군사가 창과 칼을 들고 왕비의 가마를 호위했다.
    왕은 문무백관이 나가 왕비를 맞도록 했다.
    드디어 왕비를 모신 가마와 호위 행렬이 도성 안으로 들어섰다.
    "중전마마!"
    "중전마마!"
    거짓 국상으로 상복에 흰 삿갓까지 썼던 백성들이 중전의 행차를 보자 큰절을 올리며 환호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왕비가 살아 돌아오자 백성들은 기쁨에 북받쳤다.
    왕비는 어둡고 좁은 가마 안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강하고 칼날 같은 눈빛이었다.
    이때 길게 드리워진 청국 군사들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무엇이 왕비의 깊숙한 곳에서 솟구쳤다.
    머릿속에선 수백 가지 생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2부 끝
    다음 주부터 <그림자 황후> 3부가 시작됩니다.

    (3부 1화는 2021년 9월 24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2부 (18) 아사달의 성모처럼
    그림자 황후 2부 (17) 대원군 납치
    그림자 황후 2부 (16) 언론을 누르고 임오군란을 이용하다
    그림자 황후 2부 (15) 김옥균 후쿠자와를 찾아가다
    그림자 황후 2부 (14) 시신 없는 관 앞에서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13) 욕망의 나르시시즘
    그림자 황후 2부 (12) 임오군란의 서막
    그림자 황후 2부 (11) 청룡(靑龍)이 나르샤
    그림자 황후 2부 (10) 초승달에 찔리다
    그림자 황후 2부 (9) 꽃 선물을 받고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그림자 황후 2부 (7) 강화도 조약과 승려의 요지경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그림자 황후 2부 (5) 강 상궁의 마음을 사로잡다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그림자 황후 2부 (2) 사무라이의 메이지유신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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