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3부 (2) 의식화의 귀재 김옥균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10.01 23:00

    [그림자 황후]

    3(2) 의식화의 귀재 김옥균


    1882년 9월 증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 갑판.
    거센 바람에 날릴 것 같은 갓과 도포 자락을 부여잡은 박영효가 서 있었다.
    증기선이 거침없이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것이 바로 개화로구나!"
    스물두 살 박영효는 바람을 향해 환호했다.
    옆에는 장죽을 든 김옥균이 지그시 웃고 있었다.
    김옥균은 왕의 밀명을 받고 이번 수신사에 합류했다.
    "하하하!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어떻소이까?"
    김옥균과 박영효의 눈빛이 강렬하게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한성 붉은고개(정독도서관)에 자리 잡은 김옥균의 집에서 조선의 개화를 토로한 사이였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이는 김옥균의 집.
    김옥균의 옆집에는 서재필이,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 홍영식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북촌에 살면서 개화와 부국강병의 꿈을 꾼 개화당이었다.
    시작은 붉은고개에서 쪼르르 달려 내려가면 있는 박규수의 재동 사랑방이었다.
    부근에 수신사 종사관으로 온 서광범이 살았고, 금릉위 박영효의 집도 바로 지척에 있었다.


    김옥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본행에 그동안 포섭한 유혁로, 변수를 포함해 ‘충의계’ 인사 몇 명을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열정의 화신인 김옥균은 적임자라 생각하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김옥균은 일찌감치 장원 급제의 홍패를 거머쥐고 왕의 총애를 받는 당대의 명사였다.
    그런 김옥균이 차별받던 무관과 중인, 승려에 다가가 개화의 불꽃을 던졌다.
    백담사 승려 무불(無不)은 김옥균을 만나 ‘탁정식’으로 거듭나 일본으로 향했다.
    김옥균이 "지금은 세계의 지식을 흡수해야 할 때이며, 세계 무대에 나설 인물이 필요하니 영어를 꼭 배우라"며 설득한 사람은 윤치호였다.
    감동한 윤치호는 열일곱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문과에 합격한 서재필에게는 일본 무관학교에 입학하라고 권해 인생을 바꿔놓았다.


    김옥균은 구중궁궐의 궁녀까지 충의계로 끌어들였다.
    궁녀 고대수(顧大嫂)였다.
    여느 사내보다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궁녀였다.
    ‘다시 돌아보게 하는 큰 여자’라는 뜻으로 ‘고대수’라 불렸다.
    사내 서너 명도 당해내지 못하는 여장사로, 왕비의 밀착 호위를 맡은 궁녀였다.
    왕과 왕비의 내밀한 생각과 동선을 알려면 지밀 궁녀가 필요했던 것이다.
    궁녀와 내통할 경우 사형 아니면 유배형으로, 목숨을 건 일이었다.


    머리가 비상하고 달변인 김옥균이 개화에 대해 말할 때면 우주를 삼킬듯한 기개가 있었다.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하고 양반 상놈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소!"
    ‘충의계’로 들어오면 맘대로 갈 수 없는 일본으로 데려가 발전상을 보여주며 감복시켰다.
    또 하나, 상대의 깊은 곳을 푸욱 찔러 갈망을 풀어주는 기막힌 능력이 있었다.
    왕이 김옥균에게 수신사 임무를 명하자, 그는 박영효를 대신 천거했다.
    박영효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자, 가슴이 뛰고 생기가 돌았다.
    부마로서 부와 특권은 있지만 정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그에게 달콤한 빗줄기와도 같았다. 김옥균은 박영효의 헛헛함을 예리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왕의 사랑을 받고 재력이 든든한 부마 박영효는 개화당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에 승선하면서 바짝 긴장했지만 선장과 왜인들의 깍듯한 태도에 놀랐다. 강화도 조약과 임오군란 직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왜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부마라 대접이 융숭한 건가?’
    영국에서 건조한 메이지마루는 일본 천황이 타는 어소선(御所船)이기도 했다.
    부마라는 지위를 새삼 느끼며 뿌듯해졌다.
    열두 살 때 철종의 영혜 옹주와 가례를 올렸지만 석 달 만에 홀아비가 된 비운의 부마였다.
    2000평이 넘는 집과 궁녀, 하인을 받았지만 국법으로 부마의 재혼은 금지돼 있었다.
    ‘왕실이 날 거세했구나!’
    박영효는 가슴에 불이 날 때면 영혜 옹주의 묘를 찾아 힘껏 말을 달렸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울분을 터뜨리다 불교에 눈을 돌리게 됐다.
    형의 소개로 열 살 위의 김옥균을 만났고, 불교를 이야기하며 가까워졌다.


    박영효는 궁궐의 꽃 같은 상궁과 궁녀들이 내는 치마의 사각거리는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들의 몸에서 살짝 풍기는 체향만으로도 어지러웠다.
    특히 왕과 왕비의 금슬은 몹시도 부러웠다.
    왕비는 누구보다 영민했고 백합처럼 우아했다.
    왕비는 상소문을 모두 읽고 북경에서 보내는 신서(新書)도 샅샅이 읽어 바깥 세계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박영효는 여장부인 왕비를 미워하면서도 강하게 끌렸다.
    외로운 밤 왕비의 고혹적인 자태가 떠올라 몸부림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속으로 되뇌었다.
    ‘서양처럼 개화되면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드는 구태와 악습도 끊어지겠지!’


    "박 대인께서는 조선의 국기를 준비하셨나요? 선장인 제임스가 다른 나라의 국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메이지마루에 함께 탄 영국 공사 애스턴이 박영효에게 물었다.
    "이미 우리 대군주께서 하사하신 것이 있습니다!"
    가운데 청과 홍이 어우러진 태극과 주변에 주역의 8괘가 그려진 ‘대조선 국기’였다.
    조선은 1881년부터 대조선, 왕은 대군주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왕은 박영효가 수신사로 떠나기 전 태극기를 내주었다.
    강화도 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거치면서 국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태극기를 받아 든 박영효는 감격했다.
    "태극이 나뉘어 음양이 되고, 음양이 다시 사상(四象)이 되고, 사상이 8괘가 되지 않나. 8괘가 다시 나뉘어져 결국 1677만4200개의 괘가 되는데 이는 백성의 수요. 임금과 백성이 서로에게 말미암음이오."
    왕은 자신이 도안한 태극기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정조대왕을 흠모해온 왕은 통치 철학을 담아 조선의 국기를 그렸다.
    정조대왕은 주역을 깊이 연구하면서 1677만4200개의 괘가 백성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국기는 멀리서도 명확하게 보여야 하고, 다른 나라에서도 따라 그리기가 편해야 합니다. 여기의 8괘는 복잡하니 4괘로 바꾸면 더없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태극기를 본 제임스 선장이 반가워하며 의견을 말했다.
    박영효는 일리가 있어 따르기로 하고 조정에 이를 보고했다.
    흰 바탕에 태극을 중심으로 주역의 4괘를 두른 태극기의 완성이었다.


    (3부 3화는 2021년 10월 8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3부 (1) 박영효 메이지마루(明治丸)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2부 (19) 왕비의 귀환
    그림자 황후 2부 (18) 아사달의 성모처럼
    그림자 황후 2부 (17) 대원군 납치
    그림자 황후 2부 (16) 언론을 누르고 임오군란을 이용하다
    그림자 황후 2부 (15) 김옥균 후쿠자와를 찾아가다
    그림자 황후 2부 (14) 시신 없는 관 앞에서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13) 욕망의 나르시시즘
    그림자 황후 2부 (12) 임오군란의 서막
    그림자 황후 2부 (11) 청룡(靑龍)이 나르샤
    그림자 황후 2부 (10) 초승달에 찔리다
    그림자 황후 2부 (9) 꽃 선물을 받고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그림자 황후 2부 (7) 강화도 조약과 승려의 요지경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그림자 황후 2부 (5) 강 상궁의 마음을 사로잡다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그림자 황후 2부 (2) 사무라이의 메이지유신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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